시안 2010 여름
섬에서 며칠
- 문태준
숫돌에 낫을 갈 듯 오가는 저 파도의 날은 넘어버렸다
파도야 종을 치듯 하지만 내 귀는 할망구 발톱만큼 두터워져
가끔 두 근어치의 구름만 눈 안에 얹힐 따름이다.
섬, 거적문 안에 앉아 머리카락도 기르고 손톱도 길러
쓸쓸한 생각들이 삼신메를 먹고 생각을 낳아 기르는
그 태생胎生의 과정을 지켜보면 생각의 창도 관대해진다는 것
섬, 불탄 집에 들어가 불길을 지피던 예전의 바람을 보는 자는 섬에 닿지 못할 것이다.
저 번잡한 새들은 밤새워 울어도 섬을 유혹하진 못할 것이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쓴다는 것은 시간과 짝을 지어 떠내려가는 것들,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건져 올리는 행위이다. 음습하고 눅눅하게 시들어가는 영혼을 몸 밖으로 불러내어 위무하고 소통시키는 일이다. 꽃 진 자리마다 열매를 매다는 푸나무만도 못한 인간의 영혼, 그 쓸쓸함을 편드는 일이다.
- 최민자, <문학적 자전> 중
기억이란 시간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장소일지 모른다. 무자비한 시간에게 발각당하지 않고, 그 급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후미진 강가 어디쯤에 퇴적된 결고운 모래톱 같은 것, 아니면 시간의 외줄기에 드물게 열매 맺는 아릿하고 달보드레한 나무딸기 같은 것, 그것이 기억의 실상일지 모른다.
- 최문자 <푸른 자전거> 중
나 말고는 아무도
- 김이듬
올해 막바지에 팔에 금이 갔다
빙판에 미끄러졌나 보지
결국 그 선배 멱살을 잡았구나
친구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던지고
가만히 등 뒤로 와서 너는
자해한 거 아니냐며 킬킬거린다
아 멋진 밤이다
어둡고 캄캄하고 불확실하고
우리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욕망으로 가득차서
구체관절인형 가지고 놀 듯 서로를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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