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정일근, 문학과지성사, 2009(초판2쇄)
시인의 말
시인에게 시집은 십자가다.
그 시집에는 대못이 아니라
자잘한 못들이 무수히 박히고
박혔다 빠지고 다시 박힌다.
어느새 열번째 십자가를 지고
눈이 내리는 은현리 들판에 섰다.
오직 하나의 대못으로
나를 못 박고 그대를 못 박는
시인의 십자가를 꿈꾸며.
겨울의 길
춥고 버려진 것들
서로서로 껴안아 길을 만든다
응달진 밑바닥은 진눈깨비 다 받아
뽀도독뽀도독 눈길 만들고
두툼하게 어는 얼음 안고
개울은 강으로 가는 얼음길 만든다
아홉 새끼 제 품에 다 쓸어안고
아낌없이 주는 어미 개의 피와 살로
영하의 겨울밤에
생명의 길은 거룩히 불 밝히고
아득히 먼 하늘 끝, 별과 별이 손잡아
하늘의 길 미리내는 빛난다
사랑이여, 당신이 날 껴안아
이 겨울 은현리 빙판길 되어도 좋다
그걸 슬픔이라 불러도 좋다
그 위로 누군가 또 누군가 걸어갈 것이니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반들반들한 발길 거기 날 것이니
11월
혼자 내원에 들었다
정시 정각에 도착한 열차처럼
나는 가장 좋은 시간에 닿았다
잘 익은 나무들과 함께 걸어서 당도한 11월
나무의 1과 1 사이로 황금빛 수평선 펼쳐지고
그 사이로 겨울 철새는 풍경이 되기 위해
먼, 차가운 먼 북쪽에서 세차게 날개 치며 돌아오는 중이다
물들기 위해 봄부터 함께 걷기 시작한 나뭇잎
한 장 한 장, 햇살 되받아내며 눈부시고
바람은 차고 맑은 몸으로 찾아와
마지막 꽃씨와 풀씨를 날린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원융무애의 바다에 당도하듯
내원의 나무가 걸어서 당도한 바다, 저 깊은 바다
먼저 물든 낙엽부터 먼저, 풍덩풍덩
미련 없이 돌아가는데
묵언하는 나무가 날기 위해 천천히 등을 굽힌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그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바다에서 나는 부활한다
삶을 통째로 빨아 널고 싶은 날
바다, 푸른 바다로 가자
지친 살덩이와 거친 뼈다귀 훌훌 벗어던지고
찌들어 바짝 말라버린 영혼은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버리고
도시에서 검게 찌들어버린 희망 가슴에서 꺼내
바닷물에 넣어 빨래를 하자
추억의 뒷주머니에 넣어두고
까마득히 잊어버린
빛바랜 첫사랑도 꺼내 빨아야지
와이셔츠 목덜미에 묻은 때 같은
풀이 죽어 쭈글쭈글해진 꿈에서
시커먼 구정물이 콸콸 빠져나가
다림질한 팽팽한 수평선이 될 때까지
나를 통째로 빠는 거야
바다만 한 둥글넓적한 대야에
세상에서 가장 푸른 바닷물을 부어놓고
맨발로 그 빨래들을 신나게 밟아서 빨아보자
삶에서 푸른 물이 펑펑 다시 솟아나올 때까지
지근지근 자근자근 밟아주자
바다에 나를 넣어 빨래하면서 심심해지면
다도해의 섬을 모아 내 입술 위에 올려놓고
휘파람을 불어주리라
도망가는 고래를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내 그리운 사랑의 시를 읽어줄 것이니
모든 것을 다 받아주기에 바다란 이름이 된
우리나라 쪽빛 바다에 나를 빨아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탈탈 털어 말리며
나는 봄 도다리 가을 전어처럼
여름 갯장어 겨울 새조개처럼
온몸으로 펄쩍펄쩍 뛰며
싱싱하게 부활할 것이다
그때 내가 당신을 다시 유혹한다 해도
바다를 몸에 쫙 붙은 블루진처럼 입고 젊어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자연의 뒷간
오래 비어 있던 집에 세 들어
마당에 자랑처럼 푸른 잔디 가꾸며 산다
난생처음 가져본 잔디 마당인데
자고 나면 잔디밭은 개똥밭이다
똥 누는 개에게 고함치며 화를 내봐도
개 몽둥이 들고 대문 앞을 지켜봐도
동네 멀리서부터 당당한 걸음으로
내 잔디 마당으로 똥 누러 오는
저 개들을 나는 이길 수 없다
하늘 나는 날개를 가졌기에
산비둘기는 자유롭게 똥 누고 산다
지붕에 똥 누고 신발에 똥 누고
빨래에 똥 누고 장독에 똥 누고
어떤 날은 내 머리 위로
물똥 누고 휙휙 날아가버린다
자연의 땅에 말뚝 박아 경계 긋고
집 세우고 새 번지 만들어
사람 이름 새긴 문패 달고 살지만
오래전부터 그곳엔 뒷간이 있었다
들쥐가 땅 파고 똥 누고 가는
도둑고양이가 몰래 똥 누고 가는
자연의 뒷간에 사람이 살고 있다
나라에 주거세 내면서 살고 있다
맨발의 눈
맨발처럼 좋은 눈 어디 있는가
꽉 쪼인 구두의 형식 벗어던지고
구겨진 양말의 문법 벗겨버리고
은현리 가을 들판 맨발로 걸어간다
허리 굽은 연금술사가 빚어낸 황금 문장을
맨발의 두 눈으로 경건히 읽어가노라면
단풍 잘 든 금빛 미루나무 같은 느낌표가
몸속 그득그득 찬란하게 찍힌다
문자는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의
고독하고 쓸쓸한 기호일 뿐이려니
하늘은 하늘의 빛나는 말씀을
땅은 땅의 거룩한 말씀을
사람 사는 세상에 불립문자로 뿌려놓았으니
그 말씀 뿌리가 읽어 하늑하늑 꽃 피고
꽃이 읽어 우렁우렁 열매 맺는다
스스로 뛰는 심장 가진 생명의 문장은
대자연의 호흡으로 대지 위에 숨 쉬느니
나는 지구라는 위대한 시인이 쓴 서정시를
사람의 내일을 기록한 예언서 1장 1절을
지금, 맨발의 눈으로 읽고 가는 중이다
슬픔, 그때
종일 한 잔의 물로 그 슬픔 견뎠는데
밤에는 잠들었다 깨었다 하며
열 통의 피오줌을 누었다
그 하룻밤 사이 내 얼굴 군홧발로 짓밟고
세월 천 년이 뚜벅뚜벅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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