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걸, 페터 회, 랜덤하우스, 2010(14)

 

 

 

 건물은 어두운 데다 잠겨 있었다. 그러나 추기경에게는 열쇠가 있었다. 그 열쇠로 엘리베이터 계기반 위쪽에 있는 사무실을 모두 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고층 건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없다고 키르케고르가 어딘가에 썼다.

 

 

 

 다른 곳에 돈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요?”

 그것도 가능합니다. 스위스에서는 탈세가 범죄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행위로 간주되니까요…”

 

 

 

 덴마크 클래스 복권은 매우 복잡한 데다 상금 액수도 크다. 당첨 확률 20퍼센트에 수익률 65퍼센트. 세계 최고의 복권 중 하나다. 그 복권이 위로가 됐다. 여러 개의 가능성이 집중된 작은 물건. 우주에 대한 작은 도전. 이 복권을 갖고 그는 대담하게 신한테 도전했다. 신의 존재를 폭로하기 위해. 승자로서의 신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 단조로운 4월 중순에,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는 죽어가고 있어요.”

 카스퍼는 그녀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음과 화해했다.

 

 

 

 그녀의 슬픔은 좀 더 깊은 곳, 유가증권을 보관해둔 은행 금고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나왔다.

 

 

 

 카스퍼는 술을 마시고 눈을 감았다. 술은 한 무리의 맹금이 날아오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육체적 원기를 북돋워주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여섯 살짜리가 이렇게 떨어졌다면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흔두 살 먹은 어른이 이렇게 떨어지면 이 정도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그리고 어딘가에 여전히 그의 관객이 있었다. “관객은 내 자아의 반이다.” 예전에 그록(스위스 출신의 전설적인 어릿광대-옮긴이)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객석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폈다. 그는 관객 모두를 사랑했다. 관객이 거기 없을 때조차도.

 

 

 

 뭔가를 원하는 기도는 할 수 없어. 적어도 다른 음표를 달라고 기도 할 수는 없어. 다만 자신이 타고난 음표를 최대한 잘 연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지.”

 

 

 

 둘은 밖으로 나왔다. 도시의 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 나아졌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자신의 소리 말고 다른 소리는 듣지 않는 게 아닐까?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소리는 에너지가 별로 없다. 이런 소리는 보통의 기압을 극소량 올린다. 심지어 100명으로 구성된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바그너의 한 악절을 크게 연주한다 해도 커피 한 잔을 데울 정도의 에너지조차 발산하지 못한다.

 

 

 

 꼭 누군가에게 기도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요. 기독교 초기 사막의 교모(敎母, 수녀를 달리 이르는 말-옮긴이)들은 하느님은 형태나 색이나 알맹이가 없다고 하셨죠. 기도에는 대상이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요. 기도는 적극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게 바로 당신에게 필요한 일일 거예요. 파멸하지 않으면서 포기하는 것.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항상 자신의 일부만 건다. 그는 그런 약속을 많이 들었다. 결혼식 때, 신앙 고백 때, 의형제를 맺기 위해 피로써 맹세할 때. 그 귀중한 약속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10퍼센트 이상을 거는 법이 없다. 그것이 사람들이 통제할 수 있는 최대치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용서를 비는 기도에는 뭔가 불온한 점이 있다고 어딘가에 썼다. 그건 마치 신이 이미 용서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내심 믿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 말고 뭘 할 수 있겠는가?

 

 

 

 우린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에요. 조금이라도 순순히 잃으려고 노력하는 것.”

 

 

 

 아이를 죽인 사람의 내면에선 어떤 소리가 나죠?”

 그 질문을 피할 수만 있다면 아주 먼 길이라도 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청년의 노란 눈이 어둠 속에서 강렬하게 빛났다.

 살아오면서 딱 두 번, 아이를 죽인 사람과 마주 앉은 적이 있었지. 둘 다 예술가였어. 하나는 사고로 아이를 치여 죽였고, 다른 하나는 자식을 때려 죽였지. 그들 주변에는 침묵이 감돌아.”

 

 

 

 술은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만큼 심오한 효과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효과는 빠르다.

 

 

 

 그는 바이올린을 벽에 기대놓았다.

 슬프고 우울한 샤콘느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 걸까?

 

 

 

 대개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아. 우리가 듣는 건 편집된 거야.

 

 

 

 먹기 전에 기도하는 건 좋은 일이죠.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미시적인 죽음과 재탄생을 경험하게 되거든요. 기도를 통해 우리는 거룩하고 비물질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돼요. 그 후에 완전한 뇌세포와 미각과 성교 능력과 청각을 가진 신생아로 부활하는 거죠. 이상적으론 그렇단 말입니다.”

 

 

 

 가끔 세상에는 단 하나의 샤콘느만 있는 게 아니라 끝없이 늘어나는 음의 본질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그런 것 같다. 아마 우리 각자는 단 한 사람이 아니라 현재를 떠도는 유일무이한 별자리들의 끝없는 연속일지도 모른다.

 

 

 

 “… 만약 누군가가 굶주리고 있으면 모두가 허기를 느끼지. 행복도 그래. 개인적인 행복이나 자유는 존재하지 않아. 만약 클라라마리아가 자유롭지 않다면 나도 자유롭지 않아. 그 아이가 나야. 아마 그게 사랑이겠지.”

 

 

 

 “… 내 말이 무슨 뜻인지이해할 수 있어? 에크하르트의 말이 떠오르는 군. ‘이렇게 많은 소리를 낳기 위해 신은 누구와 사랑을 나누었을까?’ 이 소리의 낙원 중심에 당신의 소리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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