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10 겨울
아내와 함께
박의상
한 쪽 젖이 큰 아내여, 새끼가 윗니 하나로 쪼아댄 그 검은 젖꼭지로라도 나를 짓눌러 주게. 뒷방에 쌓인 드라이 밀크 깡통을 누르는 먼지같이 흐릿하게 말고, 맨 위의 깡통이 밑의 빈 깡통을 짓누르는 것같이.
새끼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우리끼리라고 다짐하였지만, 그때의 내 말은 아직 내 자신에게도 달콤하지만, 아내여 푸른 비눗물에 손목이 부어서, 빨래를 내걸려고 내미는 손등이 햇볕에 너무 따가와서
울고 섰는 아내여, 내가 짓는 죄는 그래도 새끼가 없을 때 지은 죄보다는 가벼우리. 도둑질도 간음도 죄가 아닐 때, 멸시만은 정말 죄가 된다고 하지. 내가 그대의 지아비가 되었을 때부터가 아니라, 그대가 아내가 되었다고 믿은 때부터지만.
신뢰하는 것, 긍정하는 것을 지나서 아내를 알고 나서부터는 무심하였네. 지난 시절이 그립기보다 짜증스러워서도 우리는 빨리 자고 더 많이 잤던가.
잠든 아내여, 두 젖이 보름 밤 언덕처럼 떠 있네.
나는 또 불통을 휘두르며 달려 갈까나. 작은 숲 사이로 더 어린 아이들이 따라나오고, 나는 달을 향해서 이 불의 씨들을 우리 새끼 눈에 대어 보여 줄까나.
포도나무
박목월
두 팔로
자기의 젖무덤을
보듬어 안고
수줍은 나무,
이 시구詩句를
나는 잠자리에서
얻었다.
꿈에서 생시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그녀는
탐스러운 갈색젖꼭지를
내 입에
거득하게 물려
주었다.
시안 시인선 출간 기념 좌담 중
박의상: 시로 하루에 세 시간 정도 살고 나머지 한 여섯 시간은 관심 있는, 지금은 밝힐 수가 없는데, 관심 있는 한 분야에 대해 생각을 좀 깊게 해보는 편이고, 그리고 나머지는 다 나이든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다.
슬픔은 입이 크다
양애경
슬픔은
괴물메기처럼 입이 커서
한입에 꿀꺽
나를 삼킨다
차갑고 축축한 뱃속에서 뒤척뒤척 하는 밤
졸음에 끌려들다가도 자꾸자꾸
슬픔이 깨운다
초롱초롱한 눈
시간이 섰다가 갔다가
섰다가 갔다가
흰 머리카락이 자라나 천정까지 뻗고
다시 무뿌리처럼 이부자리에 내리면
사람 얼굴을 한 거미가 슬픔 한 끝을 타고 내려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모기는 내 목덜미의 피를 빨고
거미는 모기의 피를 빤다
목구멍을 채우는 비릿한 맛
슬픔은 입이 크다
하지만 삶은 입이 더 크다
나는 무릎으로 종종 기어서
새벽의 목구멍까지 올라간다
목젖을 살살 문질러
슬픔이 나를 토해내게 한다
그리고
서류가방을 들고 서쪽으로 출근한다
무릎인간
정병근
등과 무릎은 저토록 한몸이다
직립의 최후가 저러하다
두릅순과 더덕을 앞에 놓고
할머니 세운 무릎 바짝 껴안고 있다
무릎 위에 머리만 달랑 얹혔다
가슴도 배도 없이
턱 밑이 바로 무릎이다
팔은 등에서 나온 팔
몸 없는 팔이 무릎을 껴안고 있다
전쟁 사진처럼
무릎이 등을 바짝 엎고 있다
전차가 끌고 온 바람이
할머니를 팔랑팔랑 넘긴다
더덕 냄새가
지하도 멀리까지 퍼진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조수림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
나이가 지긋지긋한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
살갗이 부들부들한 아버지, 고집 센 소가죽 가방에 들어간다
버터스카치캔디 한 봉지 들고 검정 가방에 들어간다
아버지, 가방에서 꿈을 꾼다
시속 200km로 꿈을 꾸다 딱지를 뗀다
시속5km로 꿈을 늦춰도 꼭꼭 숨은 딸년들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가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 가방에서 길을 잃는다
어제도 내일도 모레도 왔던 길인데
왜 오늘 태양이 두 개 떠있는지
아버지, 가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포르쉐, 타고 싶은 차들 거리에 넘쳐 나는데
아버지, 가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탕 한 알 얼른 입에 넣어드려야 하는데
손가락이 똑 부러진다
바그다드 카페로 들어가시기 전에
빨리 아버지를 깨워야 하는데
혀가 바닥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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