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11년 여름
어두워지다
김명인
다짐하는 일도 흐려버리는 일도 누구에겐가
지독한 빛이어서 극광極光 까지
밀려가버렸다고 깨닫는 지금,
출렁다리도 구름다리도 걷혀버린 강 이쪽에서
건너편 저무는 버드나무숲 바라본다
얽혀 자욱하던 눈발도
그 속으로 불려나가던 길들도 그쳤는데
어스름 저녁답은 무슨 일로 한참을 더 서성거리며
망명지에선 듯 서쪽하늘 지켜보게 하는가
사랑이여, 다 잃고 난 뒤에도
무릎 꺾어 꿇어앉히는 마음의 이 청승,
쟁쟁한 바람이 쇳된 억새머리 갈아엎으면
내가 쏜 화살에 맞아
절룩이며 산등성이를 넘어간 그 짐승
밤새도록 흘리며 갔을 피 같은 어둠 몰려온다
절창
김복태
들판은 맛있는 책이다
만권 사서로 펼쳐놓은 황금의 책
태양의 바느질로 모두 익었다
잘 익은 이야기들이 달빛 받아 환하다
대지의 어머니가 빛과 어둠으로 빚어놓은 진본眞本
내가 읽고 또 읽어 보아도 배가 고프다
당연조차 놓치고 허와 기를 읽었나보다
내 생 이전에도 이후에도 가본假本 같은 건 지을 줄 모르는
진실들로 고개 숙인 저 들판을 나는 왜
어머니라 아버지라 부르고 싶은가
궁창穹蒼 아래로 절창 絶唱이신 어머니!
뿌리를 움켜쥐고 버틴 저 삶들 모두
어머니가 주시는 밥이 분명한 것은
내 배꼽자리와 탯줄로 이어진 샘,
어머니의 바다가 있어서겠지요
쇠소깍*, 남쪽
강영은
소가 드러누운 것처럼 각이 뚜렷한 너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남쪽은 날마다 흔들린다
창을 열면 그리운 남쪽,
살청빛 물결을 건너는 것을 남쪽의
남쪽이라 부른다면
네 발목에 주저앉아 무서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서움보다 깊은 색色, 살이 녹아내린
남쪽은 건널 수 없다
눈이 내리면 너도 두 손을 가리고 울겠지,
눈 내리는 날의 너를 생각하다가
북쪽도 남쪽도 아닌 가슴팍에 투명한 눈을 묻은
젊은 남자의 비애가 떠오른다
흑해의 지류 같은 여자를 건너는 것은
신분이 다른 북쪽의 일,
구실밤잣나무의 발목 아래 고인 너는 따뜻해서
용천수가 솟아나온 너는 더 따뜻해서
비루한 아랫도리, 아랫도리로만 흐르는
물의 노래,
흘러간 노래로 반짝이는 물의 살결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아직도 검푸른 혈흔이 남아 있는 마음이
무릎팍에 이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독한 사랑처럼
먼 바다로 떠나가는 남쪽
누구에게나 전설은 있지, 중얼거려 보는
내 얼굴의 남쪽
* 쇠소깍은 서귀포 칠십리에 숨은 비경 중 하나로 담수와 해수가 만나 이룬 깊은 수심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과 숲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효돈천의 하구이다.
이빨
강영은
고향을 다녀온 날 밤, 앞니가 몽땅 빠지는 꿈을 꾸었다.
가담항설의 비서秘書를 들춘 순간, 가까운 누군가가 멀어지거나 죽는다는 해몽이 놀라웠다. 이미 멀어진 이들은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 다시 떠내보내야 한다는 꿈의 편식에 생니가 아파왔다.
어린 날, 지붕 위로 던져진 젖니는 짐승이 되지 못했다 짐승이 되기 전에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고 믿었다 별똥별이 된 탈락치들이 우주의 잇몸에 박히는 동안
분홍빛 잇몸 속에 인공 뼈를 심은 나는 초식동물이 되었지만 세렝게티의 굶주린 사자처럼 물러뜯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이빨들은 피 냄새가 싱싱한 살점을 그리워했다.
아, 나는 무덤을 물고 있는 이빨,
흉몽 속으로 떠나보낼 이는 나밖에 없는데 고향의 밤하늘로 열 개의 치근을 떠나보낸 아버지, 물렁한 잇몸이 그리워지는 건 왜 일까, 살이 썩고 피가 굳어진 무덤 앞에서는 더욱
황홀한 국수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갔으면 좋겠다
국수를 삶는
윤관영
국수를 삶는 밤이다
일어나는 거품을 주저앉히며
창밖을 본다 만개한
벚나무 아래 평상에서 소리가 들린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젓다가 찬물에 헹군다
누가 아들과 아내 떼어놓고 살라 안 했는데 이러고 있듯
벚꽃은 피었다
기러기아빠라는 말에는 국수처럼 느린 슬픔이 있다
비빈 국수 냄비의 귀때기를 들고
저 벚꽃나무에 뛰어내리고 싶은 밤이다
저 별에게 국수를 권해 볼까
국수를 풀어지듯
소주가 몸 속에서 풀리듯
국수를 삶는 내가
벚꽃에 풀리고 있다
국수가 에부수수
벚꽃처럼 끓는 밤이다
저녁밥상을 물린 뒤
고영민
저녁밥상을 물린 뒤, 우리는 고요해졌다 형은 바닥에 눕고 누나는 벽에 기대었다 어머니는 다림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간장 간을 맞출 때는 생계란을 띄워보면 안단다 가라앉으면 싱겁다는 거고 계란이 떠서 꼭 백 원짜리 동전만큼 뵈면……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생계란처럼 떠오르는 시절이었다 개들마저 낯선 사람의 발소리에도 짖지 않았다 해가 하루하루 더 짧아지는구나!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뒤란에서 들려왔다 누나는 이불을 당겨 발을 덮었다 밥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입이 심심했다 문밖으로 어둠이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일출
김정인
분만실 창을 가린 블라인드 사이로
수평선이 여러 겹 겹쳐 있다
나는 등 뒤로 딸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어둠을 찢고 나오는 우렁찬
햇살 기다리고 있다
해가 내게 당도하려면 울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생각
산모는 해를 밀어낼 통로를 여느라 제 살 찢는데
혈압 체크하던 간호사는 갈 길 멀었다는 듯
수액 빠진 링거 다시 갈아 끼운다
견딜 수 없이 조여드는 가슴
딸과 나의 공통분모는
탯줄의 출구를 묶고 번진 피 아물기를 기다리는 일
안이 젖은 고무장갑 뒤집어 말리듯
항문으로 온 힘 밀어내는 소리 들리는데
‘머리가 3센티 보여요!’
떠오르는 그 해 눈부셔 눈부셔 차마 바라보지 못하다가
으앙, 터진 울음 받아 올린다
수수팥떡과 경단
송찬호
날이 환해지도록 꿈속에서 사자와 싸우다가 눈을 떴다
집안은 조용하다 식탁과 의자와 소파와 숟가락까지 모두 돈벌러나가고 아무도 없다
나는 입이 찢어지도록 크게 하품을 하다 입밖으로 사자가 튀어나올 것 같아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꿈속에서 거의 사자에게 잡아먹힐 뻔했다
문밖에는 벌써 우체부가 다녀갔다 최신 생활청량제인 공기가 소포로 왔다 영국
공기를 나중에 뜯어보자
홈쇼핑 채널을 트니 바깥을 내다보라고 하여 나가보니 하늘에서 칼과 창과 방패가
우루루 쏟아진다 나는 오늘 무엇을 집어들고 이 무기력과 싸울 것인가
우선은 먼지와 벌레하고 싸워보자 구두에 달라붙는 진흙하고도 싸워보자 무엇보다
그리고 어제 먹다남긴 수수팥떡과 경단으로 사자의 허기도 막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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