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엔 좀 애매한, 최규석, 사계절, 2011(1판5쇄)
내가 어름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내가 겨우 삽 한 자루 가진 사람들을 향해 왜 저깟 산 하나도 옮기지 못하느냐는 터무니없는 책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 깨달았다. 아이가 세월만 흐르면 되는 게 어른이란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모했다. 사실 어른은, 아니 어른도 별 힘이 없다…
20대부터 30대 초반의 몇몇 시기에 미술학원에서 대학 입시를 위한 만화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보지 않으면 나았을 테지만 매일같이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는 상황을 겪고 나니 그들을 위해, 아니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내가 퍼부었던 비난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내가 가진 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만큼을.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우리 학원에서 만화반 애들이 제일 거지잖아.
그쵸.
만화는 너희 또래 아이들 대부분이 좋아하고 싸게 접할 수 있는 장르야.
근데 왜 유독 가난한 애들이 만화를 직접 그리겠다고 나서냐 이거지.
요즘은 노는 데도 돈이 드니까 돈 없는 애들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만화를 택하는 빈도가 높겠지.
그러다보면 점점 친구도 사라지고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더욱 만화에 빠져들어.
친구도 없이 한 가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성격이 이상하잖아.
얘 봐. 이상하지?
몰두하고 있는 분야가 수학이라거나 음악이라거나 하면 성격이 이상해도
사람들은 괴짜 혹은 천재라고 부르지.
근데 그 분야가 만화라면? 그냥 싸이코야. 잘해야 오덕이고.
쌔… 쌔앰. 크헉.
오덕에서 멈추면 회생 가능성이 있지만 불행하게도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싸이코들이 직접 만화를 그리겠답시고 기둥뿌리 빼서 분수에도 안 맞는
입시 미술학원으로 모여드는 거야. 그렇게 되면 옆에도 싸이코, 뒤에도 싸이코,
각자의 싸이코 파워가 서로 씨너지를 일으켜서 ‘굽신굽신’이니 ‘털썩’이니 하는,
표기는 하되 입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의성어, 의태어들을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싸이코 오브 싸이코로 거듭나는 것이지.
이미 일반인의 감각을 잃어버린 후에는 잘 팔리는 만화를 그릴 수도 없고(잘나가는 작가들 보면
비 만화 전공자들이 아주 많다는 거 알지?) 다른 일을 찾으려 해도,
연애를 해보려 해도 어떻게 하는지 기억도 안 나. 결국 가난한 싸이코 만화가는 가난한
싸이코 만화가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가난한 만화가 부모의 영향으로
줄창 만화만 보면서 성장하다가 싸이코가 되어 또다시 만화가를 꿈꾸게 되는
지옥의 무한루프에…… 진입한 기분이 어떤가?
정선생 실력 좋잖아요?
중학생 그림 한장 갖고 뭘 그리 진을 빼고 있어요?
카툰이 뭔지도 모르는 애한테 하루 만에 어떻게 그림을 뽑아요.
아이디어 몇 개 제시해서 고르라 그러고 스케치 봐주고 채색 봐주면 간단하죠.
그게 뭐 별일이라고……
저보고 대신 그리란 얘기밖에 안 되잖습니까?
좀 도와주란 거지. 늘상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도 공모전은 자기 실력으로……
학원에서 그 정도도 안 해주면 학원을 뭐 하러 보내요?
요즘 공모전에 학생 그림 보내는 학원 없어요. 차라리 안 내면 몰라도……
제 실력 찾다가 우리만 상 못 받아봐요.
그, 그러면 학원 안 다니는 학생들이 너무 불리하……
정선생 월급 누가 줘요?
학원 안 다니는 애들이 월급 줘요?
월급은 학원 다니는 애들이 주는데 왜 안 다니는 애들 걱정을 하고 있어요?
돈 주는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해야지. 당연한 걸 헷갈리고 그래요?
정선생이 아직 어려서 그런다는 건 알겠는데……
늙어서 좋겠다.
그래, 가진 거 없으면 승질이라도 없어야지.
웃어라.
지금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아니긴~
나도 곧 취업 나갈 거니까.
그냥 형 보면…..
나한테 꿈이 없는 게 참 다행스럽달까……
너희들은 이제 기계가 될 거다
하루 열두 시간 넘게 햇빛도 안 들어오는 교실에서 시험 치고 평가하고
두 달을 반복하면.
우린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우리한테 좋은 학벌이 필요해?
아니잖아. 대학에 안 가면 만화 못 그리나? 아니거든.
그러는 쌤도 대학 갔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나처럼 똑똑한 사람도 대학에 가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
다른 걸 볼 기회가 없었어. 대학에 가면 뭘 하는지도 몰랐지만
대학에 안 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아무도 가르쳐주질 않았어. 그냥 겁만 줘.
무슨 폭탄 돌리기도 아니고… 자꾸 다음 단계로
넘기기만 하는 거야. 그리고 나에게는
학자금 대출 채무가 남았지.
아! 그렇지… 한국 입시제도는
교육정책이 아니라
고용정책이지. ㅎㅎ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셔널 지오그래픽 코리아 201108 (0) | 2011.09.28 |
---|---|
세계 정복은 가능한가 - 오카다 토시오 (0) | 2011.09.15 |
하이쿠의 사계 (0) | 2011.08.21 |
티베트방랑 - 후지와라 신야 (0) | 2011.08.07 |
시안 - 2011년 여름 (0) | 2011.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