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마음, 문태준, 마음의숲, 2009(1판3쇄)
눈주름이 세필細筆로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은 더 많이 웃고 산 사람의 몫입니다. 금 간 그릇에서 물이 조금조금씩 새어나오듯, 눈에서 웃음이 살짝살짝 번지고 흘러나와 완성된 눈주름은 고혹적입니다.
주름을 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름은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변에 서서 밀려오는 잔파도를 두 손으로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자꾸 웃는 쪽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한 척의 배와 같다 했거늘, 저편에서 이편으로 배가 건너오기를 기다리는 미덕이 사라졌습니다.
릴케의 표현대로라면 “깊은 밤중에 무거운 지구가 고독에 잠긴다.”는 가을입니다.
다만 가을 과일이 익는 속도만큼만 할 일이니, 그보다 더 빠르게 수확하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 그것이 가을을 멋지게 사는 일일 것입니다.
다산의 글을 보면 다산은 이 수오守吾에 대해, 자신을 보존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내 밭을 떠메고 도망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머리에 이고 달아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집도 지킬 필요가 없다. 유독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길 잘하며 들고남이 무상하다.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익과 벼슬이 유혹하면 가버리고, 위세와 재앙이 두렵게 하면 가버리고, 궁상각치우의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흐르는 것을 들으면 가버리고, 푸른 눈썹 흰 이를 한 미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면 가버린다. 가서는 돌아올 줄 모르니 잡아도 끌어올 수가 없다. 그러니 천하에 ‘나’처럼 잃기 쉬운 것이 없다. 굴레를 씌우고 동아줄을 돌이고 빗장으로 잠그고 자물쇠를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서정주 시인이 노래했듯이 “벼락 속에 들어앉아 꿈을 꿀 때에도 / 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이 되어주는 분이 우리의 어머니 아닌지요.
말은 당신과 나 사이를 오가는 한 척의 배에 불과합니다. 말은 ‘오해의 인큐베이터’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쓰다듬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좀 그렇다.”는 뜻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어 그냥 쓰다듬을 뿐입니다. 말을 해도 고작 입속말로 웅얼웅얼하는 것입니다. 밥상 둘레에 앉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가난한 아버지의 손길 같은 것, 으리으리하지는 않지만 조그맣고 작은 넓이로 둘러싸는 것, 차마 잘라 말할 수 없는 것. 그런 일을 쓰다듬는 일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손에는 일을 줄여라. 몸에는 소유를 줄여라. 입에는 말을 줄여라. 대화에는 시비를 줄여라. 위에는 밥을 줄여라.”(성철스님께서 한 당부)
겨울은 추운 바람벽과 외롭고 야윈 흰빛이어서 안쪽을 돌아보게 됩니다.
송편을 잘 빚는 어머니처럼 가을밤은 달을 잘 빚고, 달은 이 세상의 슬프고 가난한 자연들에게 잘 얹힙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빠진 그릇처럼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보면 한 채의 앉은뱅이집을 보는 것 같습니다.
게으름은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게으름은 내가 게으르다는 사실조차 못 느끼게 합니다. 바닥에 배를 대고 엎질러진 물처럼 한없이 게을러집니다.
등을 밀어드리면 아버지는 “혼자서는 옳게 못 밀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옳다.”라는 말을 아버지는 아주 자주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면 “옳게 됐는지 모르겠다.”라는 문장으로 일의 마무리가 잘 되었는지를 염려하십니다. 그 말씀이 이제는 익숙하고, 또 정감이 있습니다.
공부는 오직 당일當日에 달려있다. 그러니 내일은 말하지 말라! 아! 공부하지 않는 날은 오지 않는 날과 한가지로 공일空日이다. 그대는 모름지기 눈앞에 환하게 빛나는 이 하루를 공일로 만들지 말고 당일로 만들라!
소설가 이태준은 찬 달빛과 늙은 벌레소리에 가을꽃은 피고 진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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