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11년 가을

 

 

 

 

 

 

새우

                   서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잠수해버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가 정말 사라졌다

 

세상을 안으로만 껴안은 탓인지

 

구부정하게 허리 펴지 못한 저녁놀

 

몸이 한쪽으로 굽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마을 앞길도

 

굽을 데가 아닌 곳에서 슬며시 굽었다

 

생의 마디마디 펴지지 않는 토막들을 쓸어보는지

 

파도소리가 부르르르 마당에 깔린다

 

 

 

 

 

 

 

 

 

 

 

하현달

              안태현

 

 

어둠을 조금씩 뱉어내는 식성에 대해 달이 이야기하는 새벽이다 먼 산처럼 무릎을 끌어 모으고 하늘에 떠올라 어두운 귀를 닦는다

 

몸통이 크고 날개가 짧은 새 한 마리를 통째로 삼킨 달의 배가 불룩하다 이런 날은 달이 비스듬하게 눕고 크게 벌렸던 입을 반쯤 다문다 울음소리가 덜 빠져나간 풍선처럼

 

저 달은 지금 무엇에 닿아 녹아내렸나 가지를 친 나무들은 팔이 길지 않고 바람도 낮은 곳으로만 잠잠하게 불고 있다

 

쥐불놀이를 그만두고 돌아와 싹싹 씻을 때 내 얼굴의 일부가 사라졌다 남은 시간은 이미 짧아서 산 사람 곁에 죽은 사람이 여럿 보인다 대문 밖 흰밥 한 덩어리 찬서리를 맞고 있다

 

 

 

 

 

 

 

 

 

돌 하나를 집어 드니

                       이명윤

 

 

한쪽 모서리가 깨어져 있다

돌보다 더 단단한 힘이 다녀갔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어디론가 발설되었을 이력을 더듬는다

옛날 옛적 어느 추장의 돌도끼였나

날카로운 이빨이 만져진다

바람처럼 날던 날개가 보인다

어느 시골집 돌담이 되어

서느런 달빛에 몸을 적셨나

달빛 무늬 박힌

헤아릴 수 없는 날들

바위였다가, 돌덩이였다가, 돌멩이가 된

네가 걸어온 길을 생각한다

다시 입 다문 침묵

또 얼마만큼의 세월을 달려 갈 것인가

너는 끝내 남겨지고 나는 사라질 것이다

두려운 느낌이 드는 순간

돌이 어느새 나를 던져 버리고

저만치 제 갈 길을 간다.

 

 

 

 

 

 

-       누군가 잃어버린 퍼즐 조각들

 

        허영숙

 

 

바다에 풀린 달이 하얀 길을 낸다. 그 길을 따라

물이 온다

갯벌에 발목만 담그고 있던 바다의 밑그림들이 술렁거린다

오늘은 달도 만조가 되는 날

포구의 밤풍경이 다 맞추어지기까지 보름이 걸렸다

 

다시 물이 온다 얼마나 많은 섬을 훑고 돌아다녔는지 철벅철벅 오는 걸음이 느리고 무겁다

 

오래전 너는 내게 맞물렸던 한 조각, 폭풍우 같은 시절이 지날 때 너는 훌훌 뭍을 떠나 섬이 되어 숨었다 섬과 섬을 기웃거리며 다녀도 보일 듯 말 듯한 하얀 종아리, 수많은 섬들 중에 익숙한 네 무릎도 볼 줄 모르는 나는 너를 이해하는데만 반생이 걸렸다

 

익명으로 숨었나, 끝내 찾지 못한 너 때문에 눈이 아프다

 

너는 거기서 나는 여기서 조금씩 낡아간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찾았을 때는 헐렁해진 거리를 힘들어 할지도 모르는 일

 

시간을 뒤엎어 다시 끼워 맞추면

그때는 네가 보일까, 텅 빈 해안선

둥글게 굽은 옆구리에

억지로 제 몸을 들이미는 달빛,

 

 

 

 

 

 

 

퍼즐

             홍연옥

 

 

조각 퍼즐을 맞추던 아이는

온 방안을 헤집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잃어버린 조각의 빈자리가

퍼즐판 한가운데 휑하게 뚫려 있다

 

딸아이가 둘 딸린 남편을 처음 보셨을 때

아버지는 난생처음 내 뺨에 손바닥자국을 남기셨다

그 후로 퍼즐 한 조각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뚫린 가슴을 어쩌지 못하시더니

그 자리에 검은 종양을 심으셨다

 

암병동 한귀퉁이에서

퍼즐을 맞추다 다투는 나의 아이들을 보시던

아버지는 사뭇 조바심을 내셨다

(그렇게 집어던지면 영영 잃어버린다)

 

종양이 되어 돌아온 나와

낳지 않았어도 나를 닮은 나의 두 딸들과

뒤늦게 그 딸들의 동생의 된 나의 아들을

고단한 눈으로 퍼즐판에 끼워 맞추시던 아버지는

너무 자라서 맞지도 않는 종양 조각을

그대로 품어 안고 가셨다

 

시악이 난 아이가 퍼즐판 빈 자리에

행여 다른 것을 심을세라

나는 침대 밑에 숨어 있는 조각을 찾아

황급히 그 자리를 채워주었다

 

 

 

 

 

 

 

안다미로 듣는 비는

                        오태환

 

 

처마맡에 널어 말린 동지冬至께 무청처럼 간조롱히 뿌리는 비는

 

한 치 두 치 나비 재며 한 냥쭝 두 냥쭝 저울에 달며 는실난실 날리는 비는

 

일껏 발품이나 팔며 그늘마다 구름기슭 볕뉘처럼 움트는 비는

 

전당포典當鋪도 못 가본 백통비녀 때깔로 새들새들 저무는 비는

 

꺼병아 꺼병아 애꾸눈서껀 엿장수서껀 칠삭둥이서껀

 

안다미로 눈칫밥 멕이다가 나무거울로 낯짝 가리고 내리는 비는

 

 

 

 

 

 

 

 

 

 

 

뿔∙5

             오태환

 

 

벌써 56년이나, 어쩌면 그 이상이 된 성부르다 집 근처에서 한 번 되게 엉덩방아를 찧은, 기미년 생, 그러니까 올해로 아흔셋인 어머니는 여태 자리보전 중이시다 서대문역 근처에 사는 누나가 고수련하고 있다 한번씩 가 뵈면 전기장판을 엷은 천으로 감싼 요 위에서 노박이로 누워 지낸다 근데 속상한 건 그미가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태희냐? 오오, 중산이로구나 나예요 막내아들 나는 어머니를 일으켜 제대로 굽도 펴도 못하는 수족手足을 가만가만 주물렀다 터무니 없이 가물은 팔뚝과 허벅지가 따뜻한 연탄집게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나라니까요 잔귀까지 어두운 그미는 바지락 껍질 같은 눈까풀을 사그락사그락 깜박이며 내 입술만 빤히 쳐다볼 뿐이다 머리를 등 뒤에서 어깨로 받치고, 황금키위를 티스푼으로 떠서 그미의 건조한 입술을 조금씩 축였다 막내아들이라고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소용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평생 애물이었다 옷은 잘 빨아 입고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술 좀 그만 마셔라 나 때문에 그 쇠터럭같이 많은 밤을 근심으로 하얗게 새웠을 그미다 그런데 참 얄궂다 작은며느리는 금세 척척 알아보면서도 나는 종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라니까 태환이, …… 정택이라니까 그미는 어금니 아랫니 다 빠져, 불 지핀 지 오랜 아궁이 속 같은 입을 어둡게 조그맣게 오물거렸다 오오라! 정택이, 금메, 정택이는 어디 갔냐?

 

어머니는 붉은 꽃이 흥건히 찌끌어진 요 위에서 초저녁부터 한창 쇠잠에 빠졌다 팔과 다리를 오긋이 모으고 허리를 어슷하게 구부리고, 벽바라기로 모로 누웠다 불현듯 그미의 삭신 전체가 외뿔소의 단단하게 굽은, 흰 뿔을 보는 듯했다 평생 애물이었던 막내아들을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 못 알아보는 그미의 근심이, 그미의 호젓한 근심이 외뿔소의 단단하게 굽은, 흰 뿔로 변했나 싶었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세상 물정을 온전히 잊은 채, 애오라지 그미 스스로도 갈피 모를 근심만 고스란히 남아 저렇게 무작정 순한, 알지 못하는 곳으로 자면서도 혼자서 돌진하는 흰 뿔이 된 거였다

 

 

 

 

 

 

흰 고양이가 울고

                  전동균

 

 

1.

 

한쪽 발을

이불 밖으로 내밀어야

간신히 잠들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심야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야구모자를 눌러쓴 트럭들의 11

꽃들은 폭탄을 품고 있는 거야, 취한 사내에게 젖을 물리는 노래방 지하계단의 11

 

나뭇가지들이 따악 딱 창문을 때리고 있다

온몸이 흰 고양이가 울고 있다

 

낯선 내 목소리로 너를 부르고 있다

 

 

2.

 

돌 떨어지는 소리, 가슴에

돌들이 떨어지는 소리

 

꿈속에서

죽은 친구의 옷을 입고 놀다가 깨어나

채 마르기 전의 양말이며 속옷빨래를 만져본다

 

아내 몸속에서 사십 년째 자라는 애기 살을 만지듯이

핸드폰도 이메일도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점점 길어지는 밤의 손가락,

 

비상등 깜박이며 골목을 급히 빠져나가는 11

모든 것이 살해되고 용서되는 11

 

 

3.

 

이제 개들은 달을 보고도 짖지 않는다, 으깨져버린 달!

 

서로의 입을 혀로 틀어막고

울음을 참는 연인의 눈물 한 방울이

모든 빛을 꺼트릴 때

 

우리의 마지막 얼굴, 그건 벼락 맞은 짐승이지, 말하며

내 입에서 유령실거미가 튀어나오는 11

 

전생과 후생이 겹쳐진 한 줄기 바람 속에 떨어질 듯

조용한 열매들의 눈, 혹은

매음굴을 빠져나와

문 닫힌 성당 앞을 밤새 서성대는 구두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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