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지오그래픽 코리아, 2011년12월
킹 제임스 성경
근대 초기 영국에서는 도시든 시골 구석이든 상관없이 종교만큼 정치적인 것은 없었다. 교회는 모든 교구에서 대부분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하나님의 성전일 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의 상징이었다.
킹 제임스 성경은 제국 무역의 일부가 돼 여송연, 의약품, 사탕과자, 소총 탄창을 싸는 포장지로 이용됐고, 마침내는 ‘여러분의 황제 폐하께서 읽는 책’으로 홍보 판매됐다.
조지 워싱턴부터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킹 제임스 성경으로 취임선서를 했다.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린렸다.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와 연설에는 모두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가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성공적이었던 킹 제임스 성경에도 어두운 면이 있었다. 출간 이래 사람들은 킹 제임스 성경을 부당하게 사용하고 조작해왔다. 선한 사람은 선한 대로 악한 사람은 악한 대로 각자의 목적에 맞는 구절을 골라서 이용했다. 성경에는 자유, 은혜, 속죄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보복과 통제를 강력히 촉구하는 구절도 적지 않다. 이 성경이 대영제국 시절에는 노예제도를 시행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듯이 제국주의가 막을 내린 세계에서도 여전히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자유와 구원은 기독교인들이 노상 말하듯 내세에 있는 게 아니라 현세에 있었다. 무타바루카는 이렇게 말한다. “노예로 살았던 경험이 도움이 됩니다. 인간에게는 구원과 대속이 필요하니까요. 라스타파리 교도들은 하늘에 있는 신을 믿지 않아요. 이들에게 구권은 인격체 안에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와서 ‘하늘에 있는 예수’를 전하지만 라스타파리 교도들은 이를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늘에는 신이 없습니다. 사람이 신이고 아프리카가 ‘약속의 땅’이죠.”
마이클 ‘미겔’론은 라스타파리교를 믿는 변호사로 30년 동안 킹스턴의 가장 험한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 그의 사무실 벽은 온통 아프리카와 에티오피아 황제의 사진들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창문에는 창살이 달려 있고 거리로 난 문에는 3중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강철로 보강 작업까지 했다. “성경은 노예를 복종시키는 데 많이 이용했다”고 론은 주장한다. 성경은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는 듯 보였다. “네 보상은 하늘에 있다.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웃음 없는 표정으로 그는 말한다.
레게∙댄스홀 음악을 하는 자메이카 출신의 몇몇 유명 가수들은 동성애를 맹렬히 비판하는 노래 가사 때문에 캐나다와 일부 유럽 국가에서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들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근거를 성경의 레위기 20장13절(‘또 남자가 여자와 함께 눕듯이 남자와 함께 누우면 둘 다 가증한 짓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그들을 죽일지니’)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는 킹 제임스 성경이 물려준 한 가지 골치 아픈 유산으로 자유로운 현대 세계의 대다수 지역에서는 용인되지 않는 엄격하고 특이한 도덕관이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우터헤브리디스 제도의 루이스 섬. 이 섬의 마을은 루어보스트에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주중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이 교회에서는 모든 성상聖像, 심지어 십자가까지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말씀만 있으면 된다.
킹 제임스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선하게도 쓰일 수 있고 악하게도 쓰일 수 있다. 이 성경은 국왕의 권위를 지키는 데서 출발해 약한 사람들을 겁주는 데 이용됐다. 이와 함께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모두의 삶에 아름다움과 친절함, 선량함이 깃들도록 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은 기원부터가 양면적이다. 청교도와 감독, 위대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동시에 위하고, 명료함과 장엄함이 공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한편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양면성, 이것이야말로 킹 제임스 성경이 남긴 진정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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