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어요, 김은자, 시안, 2011(초판발행)
달밤, 유월
어둑하니 산그림자 내려앉을 때
유월 밤 산 위로 둥실 떠오른 저 달,
자운영 풀섶이고 개울물이고
천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어느
들길에서 놓쳐버린 네 그림자인데,
쥐눈처럼 새푸른 꽃눈을 뜨는 대추나무 너머
눈물자욱 훔쳐낸 말그레한 눈자위로
먼 길 돌아 마침내 띄워 올린 맨발 같다
허방에서
허방에 빠졌다
비명도 안 지르고
발이 깨진다
선반에 올려둔 일기장이
썩은 이빨을 드러내고
붉으락푸르락 접시들이
입술을 깨문다
깁스한 발등 위에
새 봄에 나온 흰 나비
한 마리가 여긴 어느 허방일까
핼끗핼끗 눈치를 본다
스르르 흰 붕대처럼
풀어지는 날개,
발등을 치고
사뿐히 올려둔
초가삼간을 허문다
발소리도 못 내고
와르르 무너진다
세상은 나팔꽃처럼
미아는 길을 잃은 아이인가
나를 잃은 아이인가
미아를 찾아 집 나간 이도
미아를 찾지 못 하고
마침내 미아가 되어버리는,
언젠가부터 내 가슴 안에
계약서도 안 쓰고 세들어서
딸깍 불 켜는 소리
찍찍 슬리퍼 끄는 소리도
잠깐, 감감 고요하다
안이 궁금하다
내가 잃은 누군가가 헤매는 것일까
바람은 무슨 암호로 열리는 것일까
쥐눈이콩 같고 코끼리 같은 그곳
어디로 찾아 들어가야 하나
검은 얼굴이다, 아른아른
검은 비 퍼붓는 저 너머에
순두부 같은 날들
‘심심하다’는 말 속에는
동그마니 앉은 두 개의 마음이 들어 있다
추억할 것이 없는 날은 심심하지
추억을 만드는 일도 심심하여
오다가다 비도 심심찮게 오는 날,
지난여름의 모자를 꺼내 썼지
빗줄기를 타고 솔밭식당으로 가서
황사가루를 듬뿍 친 순두부를 먹었지
오늘은 심심하여 가시방석인데
순두부를 빠는 내 입은 너풀거렸지
신발은 젖은 날개처럼 쿨럭거리고
젖은 신발을 신은 나비는
파이 속처럼 막막하고
팍팍한 길을 가네
발이 빠져도 아무 걱정 없네
발 빠진 데로 솔방울이 구르고
솔잎같이 뾰족한 창을 가진 하늘에도
새 별은 무진장으로 뜨지
별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
오늘 처음 핀 달개비 꽃술에 달린
비 끝에 심심한 머리를 잘랐지
순두부처럼 어쩔줄 몰라하는 머리통,
썩은 두부처럼 낡은 모자는
집 없는 두꺼비에게 내주었네
없는 김은자
찬비 내린 아침,
목도리 하나 손에 들고
<시안>으로 가느라고
11번 마을버스를 탔다
양재역을 뱅뱅 돌아
뱅뱅사거리에서 내려
옷집 <뱅뱅>에서
파격가 세일로 내걸린
겨울남방을 하나 사고
시안사무실에 와서
팩스 받고 전화하고
순두부 점심 먹고
오후에야 보니,
어라, 목도리가 없다
어디다 두었을까 뱅뱅
어디 흘렸을까 뱅뱅
<뱅뱅>에도 없고
버스에? 길에?
무엇에 홀렸나 뱅뱅
뒤죽박죽이 되는 머리,
에라, 하고 지워버렸는데
저녁6시
집에 돌아오니
옷걸이에 얌전히 걸려 있는
없는 목도리?
없는 김은자?
나는 그림자를 입었던가
그림자가 나를 입었던가
없는 시안과 없는 뱅뱅이
뱅뱅사거리에서
없는 회전초밥처럼 뱅뱅거리며
없는 김은자가
도곡동길을 헤매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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