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와 새를 기르는 카피라이터
요즘 연애가 한창입니다.
나이가 많이 차다 보니 연애란 게 예전보다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여친이 묻습니다.
오늘 언제 끝나?
제 쥐가 대답합니다. 모르쥐.
여친이 다시 묻습니다.
이번 주말엔 쉬어? 공연 볼 수 있어?
제 새가 대답합니다. 글새.
모르쥐는 궁벽하게 겁먹은 소리로 모르쥐 모르쥐.
때로는 삐친 고양이를 향해 달겨들 듯 복받쳐 모르쥐! 웁니다.
글새는. 글쎄글쎄 서글프게 울며 날아다니다
바깥 하늘이 보이는 통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떨어집니다.
저는 제가 기르는 쥐와 새들이 점차 줄어들 줄 알았습니다.
요즘 극지방부터 아프리카는 물론 동남아 어디나
멸종 동식물들이 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제 쥐와 새도 그렇게 수그러들 줄 알았죠.
하지만 왠걸. 요즘도 그 어느 때보다 번성 중입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눈치를 무릅쓰고 이번 주말 좀 쉬어야겠다고,
오늘 좀 일찍 퇴근해야겠다고 얘기하면 됩니다.
사원 땐, 대리나 차장이 부러웠습니다. 저렇게 따박따박
자신의 권리를 말할 줄 알았죠.
차장이 되니 사원이 부럽습니다. 사원은 뭔가 저렇게 말해도 괜찮은
그런 순진한 분위기가 있어서 용인이 될 것 같습니다.
결국은 또 저의 문제입니다.
사원일 땐 사원이라 말 못하고,
차장일 땐 차장이라 쉽게 말 못하니까
쥐와 새들이 미친듯이 찍찍 꺅꺅 난리를 칩니다.
아마도 이래서 여자들이 나쁜남자를 좋아하나 봅니다.
여친은 글쎄 울음소리나 모르쥐 찍찍대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을까요.
어쩌면 다 제 무능력함으로 알지도 모르겠네요.
회사 때문이다, 팀장 때문이다, 업무량 때문이다, 광고주 때문이다,
새로온 임원 때문이다, 얄팍한 월급 때문이다, 물려준 것 없는 아바이 동무 때문이다,
파렴치한 대기업 때문이다, 공무원 때문이다, 불지 않는 태풍과 끊기지 않는 전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숨 쉬는 내가 잘못이다, 등등
언제나 원인은 있습니다.
다만 해답이 없을 뿐입니다.
아 제가 꿈꾸는 해답이 있긴 있습니다.
뭐든 쓰기만 하면 쫘좍 영혼에 금이 갈 정도의 엄청난 카피라이터가 되어
카피 한 줄 쓰려고 몇 시간이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러면 작업 시간이 현저히 줄 테고
제 쥐와 새들도 함께 줄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할 텐데 말이죠.
아, 이번엔 또 말이 튀어나왔네요.
있어요 그런 말이. 말이죠, 말이죠, 하면서
그 말대로 못해낸 저를 비웃으며 주위를 동그랗게 뛰어다니는 말이 한 마리 있습니다.
주변이 가히 동물농장이라 어릴 적 기르던 강아지 고양이들이
많이 그립지 않은 카피라이터입니다.
글쎄, 라고 말할 때 내 입은 조그만 새장이 되고
글새는 내 울음을 먹고 야근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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