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의 문제, 하워드 제이콥슨, 은행나무, 2012(1판2쇄)
그는 재난과 슬픔에 맞춰져 있었지만 그 둘은 항상 다른 곳을 덮쳤다. 한번은 나무가 쓰러지면서 그의 뒤로 1미터쯤 떨어진 곳을 걷던 사람을 뭉겠다. 그는 비명 소리를 듣고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지 고민했다.
그리하여 여전히 그가 잃을 것이라고는 삶밖에 없었다.
그의 내면에는 싸움도, 보존의 본능도, 아무르 드 수아(amour de soi, 자애심)도, 한 인간을 하나로 뭉쳐주고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접착제를 표현하는 그 어떤 단어도 없었다.
하지마 언제는 그에게 그런 것이 있기나 했던가?
‘힘내.’ 그건 정말 슬픈 말이었다. 기대할 것이라고는 힘내는 것밖에 없다면, 그가 힘을 낼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힘내서 할 일도 별로 없음을 시인하는 셈이니까.
“남편의 나이가 두 배 많으면 왜 안 되는데? 음악가들은 영원히 살잖아. 네가 그보다 오래 살면…….”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 절대 –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계속 살아갈까? 어떻게 단 한 시간, 단1분, 단 1초라도 살까? 어떻게 자신을 다잡을까?
그는 리보르에게 묻고 싶었다. ‘혼자된 첫날 밤을 어떻게 보냈죠, 리보르? 잠을 잤나요? 그 후로 잠을 자나요? 아니면 당신에게는 잠밖에 남은 것이 없나요?’
그는 어깨에 인간 피라미드를 쌓은 곡예사처럼 밤의 꿈들을 쌓아 올린 채 학교에 가곤 했다.
그는 남자들이 하는, 또는 하곤 했던 일을 했다. 그러니까 밀가루 부대를 거래하는 상인처럼, 앞에 있는 여자의 가슴이 얼마나 풍만한지를 저울질했던 것이다.
그는 리보르처럼 슬픔을 미래에 투사할 수 없었다. 그는 미래의 타일러가 그립지 않았다. 그저 과거의 타일러가 그리울 뿐.
“그래요, 맞아요, 그런 거죠. 나는 그녀의 빛바랜 아름다움이 좋아요. 당신이 읽는 동안에도 빛이 바래는.”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한 채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수영하는 사람을 뜨게 하는 수영장의 따뜻한 물처럼 그를 감쌌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인생이 당신에게 친절했기를 바랍니다. 내게는 그랬습니다.”
여자 두 명이 반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둘 다 에미보다 20년은 젊겠다고 리보르는 생각했다. 그는 이제 수십 년 단위로 생각했다. 10년은 그에게 가장 작은 단위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싫어했다. 그저 사랑하는 말키가 있을 뿐, 사랑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가 불안해해요. 생각이란 것이 세균 같다면 어쩌죠? 우리가 모두 감염되었다면? 알빈 폴리아코프는 어느 순간 어딘가에서 감염되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무시할 수 있죠? 미치광이든 아니든 퍼지고 있어요. 이건 어딘가에서 나와서 어딘가로 가죠. 의견은 증발하지 않아요. 우주에 머물죠.”
‘내가 죽었을 때 남편이 열어볼 것’이라고 적힌 상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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