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 쓴 일기, 박성준, 문학과지성사, 2012(초판)

 

 

 

 

 

 

 

 

검붉은 삼베 위에 좁쌀이 뜰 때

 

 

그 와중에도 나는 몸을 혐오했다

귀신에게 체온을 주는 일이란

나쁜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의 표정인 것만 같아

함부로 밀실을 말하기가 싫다 잊어라

부디 못 잊을 몸, 밉다 날아라, 해도

마당이 있으면 춤이나 추고 가고

배경이 있으면 목소리 대신, 곡소리로만 머물다 가라

 

시집 가는 딸 이불 혼수에 부적을 몰래 넣어주는 여자들의 풍습은 그 집 귀신이 되라는 말에서 숨이 차다

귀신에게 홀린 것

여길 버리고 간다고 한판 벌이는데

귀신의 알리바이로 살라는 말에 턱. . 숨이 막혀

누이가 누이에게서 떠나, 춤을 춘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가

몸에 집중한다 구경이 난다 구경이 났어 귀신도 열꽃이 올라 감동하는가

뒤집힌 구름이 내 어깨를 깨물고 고장 난 나무며 지붕의 의욕이며 여길 버리고 울고 아프고 멀리 참고

뱀처럼 공중으로

차마 묻지 못한 안부 같은 것들만 스르륵 지나간다

몸에 서 열이 떠나면 가장 몸에게 집중하는 순간이 와, 바깥의 사물들이 덩실방실 제 위치를 뒤엎고 최후를 반복하고, 제발

가지 마! 하는데

 

뒤집힌 흰자위에서 못 본 척

꿈에다 소금꽃이나 문지르고 가려고 이 못된 누이, 그러지 말고 등에진 상여는 두고 가지 그래? 못나게 몰두하던 사람아

더 슬프기 전에 나를 임신 좀 하고 가라고, 곡소리야 춤사위야 빽, 빽 소리를 놓아본다

그 와중에도 나는 왜 귀신을 질투하지 못했나

 

이불 속에서 엉켜가는 붉은 얼굴을 생각하면 귀신이 그리워지네

꼭 한 번 안아주고 간 누이가, 솜이불만큼 두껍게 밉다

 

 

 

 

 

 

 

 

(시 중 일부..)

 

아비의 연애편지가 나를 태어나게 한 최초의 문장이었다는 것을 들켜버렸다면,

 

눈먼 자가 바다에 불을 켠다면

 

 

 

 

(시 제목)

 

아비 디스크 조각모음記

 

 

 

 

 

 

 

 

잠복기

 

 

애인의 전화가 오지 않은 동안에만 애인을 사랑한다

 

전화를 하지 않는 애인은

 

내가 전화를 할 때까지 모르는 애인이고,

내가 사랑하는 애인은 내게

 

영영 허락이 닿지 않을 연락이다

 

놀라운 먼 곳에게 동의를 구하다가

나는 이목구비가 분명한 애인과 유사한 고요를

떠올렸다

 

 

 

습관은 얼마나 나쁜 높이인가

예감한다는 것은 내일이 사라진다는 것은

수상한 손이 그린 풍경화

 

오지 않을 것에 대해 무심해진다

 

괜찮다고 열심히 웃는 애인의 미소가

간격마다 넘치고, 흘러내리는 램프 속

 

겨울 발자국의 고해를

부탁하지 않은 외로움을

 

누추한 두 손으로 모두 받아 안을 수 없다

오지 않을 만큼만 함부로 황홀해지는

옷에 남은 냄새들

 

붙잡아왔던 것들이 붙잡힌다

 

 

 

빈 방의 힘줄을 쥐고 전화벨이 울린다

외로움이 조금 흔들렸다

 

 

 

 

 

 

 

(시중 일부)

 

 

창이 깨진다 세수를 할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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