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항, 안도현, 문학동네, 2012(12)

 

 

 

 

 

 

 

북항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 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어두운 북항,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이 해안 도시는 따뜻해서 싫어 싫어야 돌아누운 북항,

탕아의 눈 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열몇 살 때 그 집 뒤뜰에

내가 당신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것 모르고 살았네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울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랗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기차 소리처럼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 견뎌야 하네

 

 

 

 

 

 

 

 

 

매화꽃 목둘레

 

 

 수백 년 전 나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마을에 나타난 나 어린 계집 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였네 나는 계집을 분()에다 심어 방 안에 들였네

 

 하루는 눈발을 보여주려고 문을 열었더니 계집은 제 발로 마루 끝으로 걸어나갔네 눈발은 혀로 계집의 목을 빨고 핥았네 계집의 목둘레는 얼룩이 져서 옥골빙혼(玉骨氷魂)이라 쓰고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 쓴 옛 시인들을 희롱하였네 그러다 계집은 그만 고뿔에 걸리고 말았네

 

 그날 나는 계집의 목둘레를 닦으려고 붓을 들었으나 붓끝만 살에 닿아도 싸락눈처럼 울었네 또 나는 붓을 들어 한 편의 시를 쓰려 하였으나 식솔들이 나를 매화치(梅花痴)라 비웃으며 수군대는 소리가 마당을 건너왔네

 

 나는 늙었네 늙어 초췌해진 면상을 차마 계집에게 보일 수 없었네 생의 목둘레선은 끔찍이 외로워질 때 또렷해지는 법이어서 나는 아래채로 계집의 거처를 따로 옮겼네 나의 혹애(酷愛)는 서성거리는 발소리로 건너갈 것이었네

 

 그해 섣달 초이렛날, 나는 매화 분()에 물을 주라 겨우 이르고 나서 아득하여 눈을 감았네 그리하여 매화꽃은, 매화꽃은 목둘레만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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