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청춘, 2012년 봄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 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멍키의 힘
이해원
서부밧데리가게 강씨
멍키로 단숨에 숨통을 죄고 트럭의 목을 꺾는다
몇 번 헛발질을 하던 트럭은
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오줌까지 지린다
강씨의 뒷주머니에 찰싹 붙어 먹이를 노리는 멍키
제네레타 쎄루모타 라지에타
‘타’자만 들어도 식욕이 돈다
차 밑에 거꾸로 매달려
온기가 남은 뱃가죽부터 뜯기 시작하자
트럭은 맹수의 습성을 풀어 놓는다
맹렬한 속도로 허기를 돌리던 엔진도
엔진의속도로 내달리던 난폭한 네 개의 바퀴도
차가운 쇠 이빨에 물리면 맥을 못 춘다
기름밥으로 뼈가 자란 강씨
소리만 듣고도 깊이 숨은 멍자국을 끄집어낸다
트럭이 흘린 검은 피 위로
지루한 오후가 파리 떼처럼 달려들고
폐품 줍는 노인이 흘끔거리며 지나간다
작은 체구에 숨은 멍키의 힘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악어처럼
빙글빙글 너트를 조인다
역을 놓치다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 버린 퇴근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기다리다 잠든 동생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미싱 앞에 앉은 엄마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인수봉
김기택
바위가 폭포처럼 쏟아져내리고 있다.
속도는 거대한 절벽이 되어
허공에 영원히 정지해 있다.
한순간도 낙차의 힘을 놓치지 않는
오랜 결빙의 힘이
그 빙하 같은 봉우리를 지키고 있다.
까마득한 봉우리 아래
돌의 폭포가 내리꽂히는 곳에서는
나무들이 물보라처럼 일어나고 있다.
무수한 나뭇잎들이 물방울처럼
공중으로 튀어올랐다가
푸른 물굽이가 되어 산을 온통 뒤덮으며
숲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다.
봄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 넣고 있다.
겨우 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푹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거리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老年花似霧中看노년화사무중간
늙은 나이에는 꽃도 안개 속에 보는 듯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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