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 안도현, 도어즈, 2012(초판4쇄)
어른이란 열일곱, 열여덟 살에 대한 지루한 보충 설명일 뿐이다.
바다에 서면 누구나 바다가 얘기해 주는 자신의 나이를 듣게 된다. 그때 바다의 가슴은 더 넓어지고 바다 곁에 선 사람은 더 단단해진다.
서른여덟이거나 마흔 살이거나, 세상의 바다를 반쯤 건넌 나이, 그리고 까닭 없는 서러움에 잠깐 젖어보기도 하는 나이. 그 서러움의 힘으로 또 살아가는, 살아가야 할 세상이 보이는 나이.
연어에게는 연어의 욕망의 크기가 있고, 고래에게는 고래의 욕망의 크기가 있다.
연어가 고래의 욕망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연어가 아니다. 고래가 연어의 욕망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고래가 아닌 것처럼. 연어는 연어로 살아야 연어이고 고래는 고래로 살아야 고래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
네가 내 옆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팠다. 네가 보고 싶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물결이 쳤다. 네가 보고 싶어서 물속의 햇살은 차랑차랑하였다.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살아가고 있었고,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살아갈 것이었다.
“봄을 어떻게 좀 만나 볼 수는 없을까요?”
일하는 분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대답 대신 흙 묻은 손을 소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 그때 소년은 그 손이 움켜쥐고 끌어당기고 있는 게 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온몸이 조금씩 푸르게 물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누구나 타오를 때는 나이와 시간의 흐름을 잊는 법. 가을 바다는 내 나이가 몇 살인지를 알려 준다. 그때 바다의 가슴은 더 넓어지고, 나는 더 단단해진다.
지금도 여름철이면 아이들이 발가벗고 바다로 들어가 헤엄을 치며 손으로 바다를 찰싹찰싹 때리는 것은 바다를 잠들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느님과 다름없는 아이들의 매를 맞고 오늘도 바다는 저렇게 푸른 것이다.
고향에 가서 구두 바닥에 진흙 묻힐 일을 상상하느라 신발장 속에 있는 구두의 마음이 벌써부터 설렌다.
사람들은 발길 닿는 대로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나는 곳까지가 감옥의 내부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안다. 일 년 동안 이름 한 번 불러주지 않는 선생님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아이도 보았고,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 하나만으로 늘 생글생글 웃는 아이도 보았다.
나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니고, 바로 톱이다. 나무들은 몸에 총알이 들어와 박히면 그저 티눈이 몇 개 생겼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름이란 아주 작은 것이다. 겨우 세 글자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름이 커지는 것은 타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때문이다.
어른들이란 자신이 못다 이룬 것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존재, 그리하여 아이들이 살아갈 시간 속에 그것을 막무가내로 우겨 넣는 존재이다.
어른들이란, 우길 줄만 알지 정작 꿈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주위에서 아이의 등을 두드리면서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너도 좋은 시절 다 갔구나.”
“이제 고생문이 훤하구나.”
입학을 축하해 주기보다 앞으로의 생활을 염려해야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물고기는 위에서 보지 말고 옆에서 봐야 아름답다.’는 말.
물고기를 위에서 보면 그것을 잡고 싶지만 옆에서 보면 그런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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