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엘도라도, 2012(초판6)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물리적 존재일 따름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들 모두 확률적(probabilistic)’이라고 설명한다. , 기초 물리학의 세계에서 결정론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 숫자란 무엇인가? 숫자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개념이다. 어느 날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읽고 있는데 드디어 고고학자들이 숫자를 발견하다라는 제목의 가사를 발견하게 되는 그런 게 아니다. 다시 말해 ‘2’라는 숫자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실체가 무엇이든지 ‘2’라고 하는 숫자는 이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으며 실제 세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존재다.

 이렇듯 수학에 관해서만큼은 우리 대부분이 플라톤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숫자의 존재를 믿는다. 우리의 이성은 숫자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사물은 그 개념을 공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연필 두 자루를 갖고 있다면, 우리의 머리는 그 연필들이 2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필이 2라는 숫자와 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필을 부러뜨릴 수는 있지만 숫자2를 파괴할 수는 없다.

 

 

 

 이야기 속 법정에서 변호사가 증인으로 부른 의사를 심문하고 있다.

 

Q: 부검 전에 맥박을 확인했습니까?

A: 아니오.

Q: 혈압은 확인했나요?

A: 아니오.

Q: 호흡은요?

A: 하지 않았습니다.

Q: 그러면 부검을 시작했을 때 그 사람이 살아있을 가능성도 있었겠군요?

A: 그건 아닙니다.

Q: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A: 책상 위에 놓인 유리병에 그의 뇌가 들어있었으니까요.

Q: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A: , 살아서 어딘가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죽고 나서 내 몸이 부활하거나 내 인격이 이식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이 나의 진정한 종말이라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거라고 쉽게 말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사실 우리는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가령 자신이 정말로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 두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한다고 해보자.

 

 

 

내 육체적 죽음은 인간으로서 내 존재의 끝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이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있을까? 일단 내가 죽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음이 내게 나쁜 일이 될 수 있을까?

 

 

 

 만약 죽음으로부터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얼마든지 죽음을 나쁜 것으로 받아들 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면 죽고 나서 자신의 영혼에 벌어질 일에 대해 걱정하게 된다. ‘천국에 가게 될까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질까?’ 죽은 다음에 자신의 영혼이 겪게 될 운명에 대해 걱정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죽음이 정말로 끝이라고 믿는다면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 될 수는 없을 듯하다.

 

 

 

 살아있다면 얻을 수 있는 삶의 좋은 모든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하는 설명은 오늘날 박탈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은 내게 나빴거나, 나쁘거나, 나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인가? 어쨌든 죽음이 내게 나쁜 것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런 사실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 다시 말해 죽음이 내게 나쁜 것이 되는 시점은 언제인가? 물론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죽음은 지금 내게 하나도 나쁠 게 없다. 어쨌든 나는 지금 죽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죽고 나면 나쁠까? 그렇지도 않다. 앞서 얘기했듯이 죽었다는 말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뭔가가 내게 나쁠 수 있단 말인가? 뭔가가 내게 나쁘기 위해서는 내가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죽음이 내게 언제나쁜지는 대답하기 어렵다.

 

 

 

 내가 없던과거, 내가 없을미래.

 

 

 

 한 편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로도 충분히 나쁘지만,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더 나빠. 나는 죽음의 신(Grim Reaper)의 손아귀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내 존재에 대한 핵심적인 진실에 직면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죽음을 더 나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죽음의 필연성이 그 부정적인 측면을 감소시켜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우리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죽음에 대한 절망감도 어느 정도 사그라질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깨달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가령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는 죽을 가능성이 있지만, 안 보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여러분은 대가의 걸작을 감상할 수 있는가? 또는 섹스를 하면 죽을 수 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만큼 섹스는 중요한 것인가? 이처럼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일을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진실은, 삶을 영위하고 그 다음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런 진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 결국 존재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특정한 조합으로 이뤄진 형이상학적 합성물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은 삶 자체 또는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조합으로써 만들어내는 전반적인 가치다.

 

 

 

 죽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아마도 두려움일 것이다. 많은 경우에 두려움은 우리가 약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이는 보편적인 감정적 반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성적으로 적절한 태도인가?”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이런 믿음이 죽음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

 

 , 여러분은 이 먼지를 알아보겠는가? 그게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기 전에 먼저 그 먼지를 들여다보자. 지금은 먼지와 재로서 존재하지만, 물에 녹아 수정으로 변할 것이다. 반짝반짝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전기 불꽃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식물이나 동물로 태어날 것이다. 신비로운 자궁으로부터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 결국 좁아터진 마음으로 걱정하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살은 신의 듯을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이미 200여년 전에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이런 주장에 대해 최초의 답변을 내놨다. 그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간을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은 창조주의 뜻이라면, 자살 역시 그분의 듯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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