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펭귄의 북 디자인 이야기, 폴 버클리, 미메시스, 2010(초판1)

 

 

 

 

 

 사람들이 음악가를 따라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를 따라다닌다. 나는 어려서부터 일러스트레이션을 접하며 자랐다.

 

 그리하여 내게는 브라이언 크로닌 같은 사람이 록 스타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예전부터 파이 차트와 그래프 같은 것을 좋아했다. 그런 장치는 뭔가를 정말로 예쁘고 다채롭게 보이는 효과를 발휘하니까. 심지어 그런 장치가 보여 주는 것이 그야말로 비참한 내용, 가령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또는 우리가 어떤 질병으로 죽게 될지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에이전트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편집자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발행인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커버 디자인이 결국 서점에 등장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외의 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의견을 개진한다. 물론 책이란 한 권, 한 권이 모두 독특하다. 여러 집단에서 저마다 다른 요구를 할 경우에는 종종 문자의 시각적 해석……, 쉽게 말해서 내용의 한 장면을 담은 커버가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이 항상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제는 뭔가 좀 예상이 가능한 이미지로 귀결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커버는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이다. 오로지 분위기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커버가 나타나면 상당히 멋지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장 보기 드문 커버는 시각적으로 비논리적인 추론에 의존하는 커버이다. 음반 포장에서는 그런 커버가 항상 등장하지만, 정작 책 포장에서는 드물다.

 

 

 

 물론 시안을 너무 많이 제출할 경우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보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선택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 시안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나는 이 과정에서 배우게 되었다).

 

 

 

 나의 2001년 작 소설 『내 작고 파란 드레스』의 커버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하신 분을 위해 설명을 드리자면, 이 책에는 사랑 이야기가 가짜 회고록 안에 숨겨져 있고, 그 가짜 회고록은 또 어디 숨겨져 있느냐면……, 나도 까먹었다, 사실은. 여하간 이것이야말로 그 당시로서는 아주 유행하는 방식이었다. 이 커버는 내가 시도한 인식론적 위조성의 여러 가지 송호 교차된 층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오히려 여러 면에서 실제 책이 한 것보다도 더 훌륭했다. 어느 독자가 아마존의 내 페이지에 적절하게 이렇게 쓴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 책에 별 한 개를 주겠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오로지 이 끝내주는 커버 때문에 주는 것이다!”

 

 

 

 길 건너려고 모여 있는 서로 무관한 사람들

 

 

 

 커버란, 지나치게 문자적이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커버는 책의 의미를 전달하는 한편, 교훈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커버는 본문의 아이디어와 어조를 반영하고, 모호하지 않으면서 암시적이어야 하는 법이다. 커버는 주인공의 얼굴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커버는 아름다워야 한다. 또는 그 외의 어떤 감각적이거나 지적인 방식으로 즐거움을 줘야 하는 법이다. 한마디로 커버를 잘 만들기란 무지막지하게 어렵다.

 

 

 

 때로는 잠자는 사이에 커버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러면 나는 얼른 일어나서 그 아이디어를 메모해 두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물론 때로는 제대로 되고, 때로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 책의 독자들은 좌파 성향에, 자의식을 지니고, 자유로운 교육을 받은 유형으로 스타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죽어라 애를 쓰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소비에 관해서 충분히 많이 생각한 끝에 급기야 소비에 관한 책까지 구입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 행위 자체를 중단까지는 하지 않는 유형의 소비자인 것이다.

 

 

 

 내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러하듯이, 나 역시 자의식 과잉의, 또는 이른바 아이러니컬하다고 소문난 콘셉트나 개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트위터러쳐』의 초판본 커버를 본 순간에 나는 영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그 콘셉트 자체가 사람을 격노하게 만들 만한 것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컨셉트에 사람을 격노하게 만들 만한 잠재력 역시 워낙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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