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고요하다, 김남수, 시안시인선, 2012(초판)
독毒
쌀밥에 고깃국 한 번 실컷 먹는 게 소원이던 먹고개*가 개 한 마리 질질 끌고 여름 산을 올랐다 쥐약먹고죽은쥐를 먹고죽은누렁이 가마솥에 푹푹 삶아도 의심은 떠오르지 않고 무쇠솥만 설설 넘쳤다 한나절 고아낸 군침 도는 허기도 죽은 쥐 한 마리를 어쩌지 못해 서로 눈치만 살피다
하! 봉해기-
무릎을 탁 쳤다
여덟 살 새끼머슴 쉰 고개를 넘어가도 '봉해가, 어이- 봉왝아' 애 어른 할 것 없이 불러대던 이름,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먹고개, 봉학이가 넓적더라 하나를 단숨에 삼키자 우르르 달려들어 확 밀쳐냈다 온 동네가 허겁지겁 뜯어먹은 죽은 개 한 마리
앙상한 가마솥
혀 빼물고 식은땀 흘리는 여름산
벌겋게 독 오른 골짜기에서
꿩, 꿔어엉,
산꿩이 울었다
* 충남 부여 산간마을.
오래된 편지
여학교 일 학년 하굣길
읍내 장터를 지날 때 몸뻬바지 질끈 동여 맨 아주머니가 따라 오셨습니다
"학상 어디꺼정 간댜 내가 까막눈이라 그려, 이 편지 좀 한번만 읽어 줄 텨?"
속바지에서 꺼낸 꼬깃꼬깃 누런 편지봉투
우리는 건너다 뵈는 동산 입구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습니다
엄니 지난 추석에는 바빠서 못 가써유
주인 아줌니가 짬 봐서 한 번 보내 준대유
보내드린 돈 애끼지 말구 아버지 병원 댕겨 와유
이번에 가면 동생 자전거 꼭 사 줄 깨유
자전거 타고 중학교 댕기는거 보고 싶어유
"학상이 시원시원하게 잘도 읽는구먼"
연신 눈가를 훔치던 그 아주머니
얼마나 접었다 폈는지 낡음낡음한 편지 한 장을 떠듬거리며 읽어드렸습니다
꾹꾹 침 발라 쓴 연필 글씨
내가 몇 번째 읽어드린 편지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복 씨 무덤에 들어가시다
구렁게 들판 닷 마지기 논에 두엄을 져 나르고 있었는데유
뚝방길 건너 읍내 순사 두 사람이 동네로 들어서고 있었는데유
지나가던 달구지가
"오복아! 클났다 너 잡으러 온다야, 군대 안 갔잖여"
놀렸는데유
육십 평생 일하고 밥 먹은 죄밖에 없는 말더듬이 오복 씨 깜짝 놀랐는데유
놀리는 거나, 놀라는 거나 작대기 한 개 차인데유
지게 작대기 벗어 던지고 골방에 숨은 겁쟁이 오복씨 쪼그리고 앉아 울어쌓더니
농약을 막걸리처럼 들이켰는데유
오복 씨 무덤에 들어가던 날 동네는 입 꽉 다물었는데유
"클났시유, 군대 갈라믄 죽는 게 나-유-우-"
마지막 유언이 귓속말로 번졌는데유
삐비꽃이 피는 이유
아홉 살 순열이가
삐비꽃처럼 뽑혀져 서울로 갔습니다
낯선 손에 끌려 부잣집 애보기로
가물가물 끝도 보이지 않는 뚝방길이 자꾸 뒤를 돌아보며
순열이를 따라갔습니다
해마다 삐비꽃은 저 혼자 왔다 가고
해질녘이면 뚝방에 서 있는 눈 어둔 지팡이
내 손목을 꼭 잡았습니다
"남수야, 널 보면 똑 우리 순열이 보는 거 가터야"
근심이 하얗게 쇠어가는 눈가에
삐비꽃 그림자만 출렁거렸습니다
읍내 서커스단이 들어오면 외줄 타는 예쁜 계집애가
순열이 닮았다고
온 동네가 우르르 달려가던 뚝방길
올해도 삐비꽃만 하얗게 피었습니다
목숨
담 밑에 버리고 간 어린것을 창가로 데려오던 날
밖에서 겨울을 나야 실하게 피는데...... 몸져누운 어머니 마른 독백이 금간 플라스틱 화분을 찬 베란다로 데려갔습니다
겨우내 잔기침 소리, 창백한 이파리는 뚝 뚝 떨어지고
나는 아침저녁 절반이나 누워버린 꽃대를 보며 한 송이만 피어 달라고 아무도 줍지 않는 말들을 물 주듯 부어주었습니다
이른 봄 무릎걸음으로 창가까지 오신 어머니
"그래그래 오래 있거라, 오래오래 있거라......"
간신히 올라온 한 송이 위태한 손목을 파르르 붙잡았습니다
저 작은 꽃심지가 식어가는 목숨에 불을 붙이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했습니다
영산홍, 올해도 약속 한 마디 매달고 목숨처럼 붉게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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