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작가정신, 2011(초판1쇄)
"부드럽고 굵으면서도 광택이 나는 털입니다. 등은 붉은 벽돌색이지만, 얼굴과 팔다리는 밤색 계통에 더 가깝습니다. 내가 꼼짝하지 않고 땅바닥에 누운 채로, 버질이 햇살을 받으며 나무에 기어 올라가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니며 움직이는 걸 보면, 구리가 녹아 흐르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지극히 단순한 몸짓까지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쳐다보기가 아찔할 겁니다."
아마추어 박제사와 전문 박제사의 차이는 인내심에 있다. 인내심에 따라 결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죽을 벗기는 과정은 역사학자가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자세는 모형의 제작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동물의 표정을 결정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과장된 자세나 중립적인 자세, 즉 움직이는 동작이나 휴식하는 동작, 둘 중 하나가 주로 선택된다. 어떤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생동감을 포착해서 전달해야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뭔가를 기다리는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차이에서 박제에는 두 방향의 철학이 있다. 첫째, 동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죽음을 부인하며, 시간이 멈춘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철학이다. 둘째,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동물이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이다.
나는 그저 죽음에서 기억을 추출해서 세련되게 다듬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역사학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역사학자도 과거를 재구성하고 이해하려고 과거에서 찾아낸 물질적 증거를 연구하지 않는가. 내가 지금까지 박제로 만든 모든 동물들도 과거의 해석이었다. 내가 동물의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라면, 동물원의 사육사는 동물의 현재를 다루는 정치인이다.
나에게도 처음의 동물은 생쥐였고 그다음이 비둘기였다. 쥘리앵도 똑같은 순서로 동물을 죽였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이 저질러진 후에 어떤 것이 구해질 수 있을까? 나는 그 의문을 풀고 싶었다. 이런 이유에서, 즉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나는 박제사가 됐다.
"당신이 뭐라고 했지요? '말이란 차갑고, 들판에서 춤추는 영혼들을 이해하려고 발버둥치는 진흙투성이 두꺼비 같은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랬습니다. 다만 영혼spirits이 아니라 요정sprites이라고 했습니다. "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건 말뿐이라고도 말했고요."
헨리도 그 말을 그대로 되받아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건 말뿐이죠."
"현실은 우리 능력을 넘어섭니다. 현실을 말로 완벽하게 표현하기는 힘듭니다. 간단한 배조차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모든 걸 먹어버립니다."
베아트리스 : 훨씬 나은 것 같아. 주로 단수로 쓰이지만 복수로 쓰면, 호러스에서 '스'라는 발음이 지옥에서 국자로 수프를 떠내 생각할 수 없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 대재앙과 대화마, 대혼란과 테러까지 대접하는 것 같아.
버질: 그래 우리가 겪은 일을 호러스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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