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문학과지성사, 2012(초판9)

 

 

 

늘 그렇게 생각해온 것처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기에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 그 무엇도 이상하지 않았다. 섹스가 다소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뭔가를 하면서도 그 뭔가를 하는 것이 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생각을 때로 가장 심하게 들게 하는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언젠가 심심한 나머지 확인해본 바, 자지를 의미하는 페니스의 동의어가 영어에는 140개가 넘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중 내가 외우고 있던 몇 개, 가령, 지미와 존과 존슨과 존 토머스와 피터와 윌리와 리틀 밥과 리틀 엘비스와 페드로와 퍼시와 소피아 공주 같은 사람 이름과, 비버에게 공격적인 존재, 외눈박이 뱀, 요구르트 총과 같은 묘사적인 표현들을 생각했고, 옆방에서 섹스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하며, 리틀 엘비스가 요구르트 총을 쏘는 모습을 상상하며, 외눈박이 뱀이 소피아 공주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나란히 가고 있는 나의 허물 같은 나의 그림자 역시도 몹시 지쳐 보였다. 내가 그 그림자에서 눈을 떼게 되면 너무 지친 나머지 그것은 그냥 뒤에 처져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그것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고 걸었다.

 

 

 

 나는 은유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게 직유가 물이 쏟아진 바닥의 물기 같다면 은유는 물기가 마른 자국 같았다.

 

 

 

 존 그리셤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적어도 존 그리셤의 책을 읽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와 친구가 될 수 없는 저 노파에게는 미안할 것이 없는 얘기지만, 저 노파는 존 그리셤을 읽으려고 아흔 가까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인생은 다소 이상한 인생 같았다.

 

 

 

 나는 어딘가에 갔을 때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묘비를 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죽어갔을 것 같지만 묘비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마음 속으로 묘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나는 멘도시노 해안에 전복을 따다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묘비와 함께, 사람들에게 잡혀 죽은 전복들을 기리는 묘비도 마음속으로 세워주었다.

 

 

 

 내게 많은 사물들이 그렇게 보이듯, 아무런 의식도 감각도 없어 그 자체로 열반에 든 것 같은 두루마리 화장지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다가왔고, 아무런 느낌도 전해주지 않았다.

 

 확실히 두루마리 화장지는 수십 년 만에 한 번 지구 가까이 다가오는 혜성이나 수백 년 만에 한 번 일어나는 화산 폭발만큼 바라보기에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가만히 바라보기에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바라보기에는 좋은 것이었다.

 

 

 

 풀밭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차츰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이, 마치 눈을 감고 한참 있다 뜨자 그사이 계절이 잘못 찾아온 것처럼 이상하게 바뀌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게 시들어 있고, 조금 후에는 시든 모든 것들도 자취를 감추며, 파란 풀밭 위를 뛰어가던 개도, 개가 뒤쫓아가던 초록색 공도, 훌라후프를 돌리거나 프리스비를 던지는 사람들도 사라지며, 황량한 언덕만 있는 이상한 계절이 된 것 같았는데, 그런 상상을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사실적인 어떤 풍경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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