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위하여, 강신주, 천년의상상, 2013(초판4쇄)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멋진 말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와 무관하게 결정된 사랑하는 벙법을 그에게 실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히도 바로 이때 사랑은 폭력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 아닐까.
매너리즘이란 매너, 그러니까 미리 패턴화된 방법을 중시하는 태도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자. 바로 나니까 가능한 사랑을, 삶을, 예술을 하자. 그래서 임제 스님도 사자후를 토한 게 아닐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자신이 아닌 어떤 것도 흉내 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스타일로 살아 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자 인문학이 추구하는 자유정신 아니겠는가.
금욕주의로 자신을 검열하는 사람은 성기性器를 가리키는 말을 접하는 순간 불쾌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김일성만세>라는 시를 듣고 청중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 내면에 모종의 검열 체계가 작동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급류를 따라 흘러가는 물고기는 오직 죽은 물고기뿐이고, 강풍에 날려 가는 새는 오직 죽은 새뿐이다.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 <긍지의 날> 중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 <거미>
반공포로의 신분에 있었던 2년! 김수영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 볼 필요가 없다."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너를 잃고> 중
김수영은 이 프랑스 영화가 못마땅했지만, 노봉실이 "그 영화 좋지요?"라고 묻자 두말없이 "네"라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그는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일기를 마무리한다.
모네의 첫 번째 수련이 그 밖의 다른 모든 수련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특수자의 일반성이라는 의미의 일반성은 단독자의 보편성이라는 의미의 반복에 대립한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개념 없는 단독성으로서 반복한다. 그리고 시를 마음으로 새겨야만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머리는 교환의 신체기관이지만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
아이의 내면보다 자신의 교육관이 더 중요하다고 전도된 생각도 여기서 출현한다. 아이가 있어서 교육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자신의 교육관에 따라 아이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모든 것이 거꾸로다"라고 이야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물 자체'는 '의미 자체'나 '지시된 것 자체'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것이다. '사실 자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실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늘 어떤 의미가 먼저 집어넣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무엇인가'는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의 고나점에서 시도된 의미 정립일 뿐이다. '본질'이나 '본성'은 항상 관점적인 것이며, 이미 다양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은 나에게 무엇인가"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주인이라면, 반대로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노예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카프카는 1904년 1월 27일 어느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친구, 가족 그리고 편집자들에게 보내는 서신>라는 자료에 실린 글이다.
아내는 반 홉 소주에 취했다 남편은 내내 토하는 아내를 업고 대문을 나서다 뒤를 돌아보았다 일없이 얌전히 놓인 세간의 고요
아내가 왜 울었는지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남편은 미끄러지는 아내를 추스르며 빈 병이 되었다
아내는 몰래 깨어 제 무게를 참고 있었다 이 온도가 남편의 것인지 밤의 것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깜깜한 밤이 또 있을까 눈을 깜빡이다가 도로 잠들고
별이 떠 있었다 유월 바람이 불었다 지난 시간들, 구름이 되어 흘러갔다 가롣ㅇ이 깜빡이고 누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을 뺀 나머지 것들이 조금 움직여 개가 짖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희경, <면목동>
시를 머리로 쓰는 모더니스트 시인과 시를 심장으로 쓰는 서정시인. 김수영은 양자를 모두 극복한다. 그에게 시는 '몸'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그자체로 선과 정의의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피해의식 탓에 그들은 언제든지 억압하는 자로 변신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예는 주인이 되기를 소망할 뿐, '주인과 노예'라는 억압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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