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2013(1 13)

 

 

 

 

 

 초상화에 등장하는 귀부인은 가슴팍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화가 앞에 앉아 있을 때나 중요한 손님을 맞는 연회를 열 때뿐이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우아한 옷을 입고 지낸다면 감기에라도 걸려 일찍 죽는 것이, 중세 유럽에서 성채를 주거지로 삼았던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템플 기사단'의 기사들처럼 "죽여라! 죽여라!"라고 외칠 마음도 들지 않았을 것이고,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의 규칙에 '이교도는 박멸해야 한다' 같은 과격한 문구는 한 마디도 없었다. 또한 아무리 성인의 말일지라도 남이 한 말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지도 않았다. 어쩌면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은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확인하기 위한 이론 무장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남자들의 집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남긴 글을 보면 '병원 기사단' 기사들의 속마음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크락 데 슈발리에' 내부에 있는 회랑을 지탱하는 아치 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다. 원문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Sit tibi copia, Sit sapientia, Formaque detur, Inquinat omnia sola, Superbia si comitetur."

 

 의미는 다음과 같다.

 

 "네가 유복한 출신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네가 지력을 갖고 태어났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또한 네가 미모를 갖고 태어났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중 하나라도 원인이 되어 네가 오만하고 건방져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오만과, 오만의 표현인 건방짐은  너 한 사람만이 아니라 네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을 해치고 더럽히며 비속화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쓸모없이 방치된 성채는 곧 절반 정도 완성된 성채다'라는 말이 있다. 즉 이들은 이슬람측의 것이든 비잔틴제국 시대의 것이든 훨씬 이전인 고대 로마시대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이용했던 것이다.

 

 

 

 마르세유는 차치하고 알레포가 비누의 제조지가 된 것은 고대 로마인에 의해 비누 제조가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중세에 접어든 후 이에 눈독을 들인 것이 베네치아인이다. 베네치아인은 입욕용이 아니라 전투용으로 이를 주목했다. 비누 분말을 녹여 적의 배 갑판 위에 끼얹으면 적병은 말이 미끄러져 넘어지곤 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상대의 전력을 떨어뜨려야 했기에 비누도 사용하기에 따라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자군 시대로부터 2백 년 후의 이야기이지만, 독일의 제후였던 뷔르템베르크 백작은 성지순례를 떠나는 도미니크회 수도사 슈미트에게 다음고 같이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권해야 할지 권하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 일이 세 가지 있다. 첫째가 결혼, 둘째가 전쟁, 그리고 셋째는 성지순례다."

 

 

 

 십자군 시대에는 베네치안아 같은 나라에서조차 군사행동에 나설지의 여부 같은 중요한 국정을 시민집회에서 결정했다.

 

 실제로 국정을 수행하는 원수(도제)나 내각(콘실리오)은 시민이라는 유권자에게 어떤 일을 무엇 때문에 실행하려 하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설명은 항상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마키아벨리도 말했듯이, 민중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의외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곤 한다.

 

 

 

 전자에서는 항상 말을 타고 최전선에 섰고, 적이 공격해와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병이 악화되었을 때는 안장에 자기 몸을 묶어서라도 지휘를 했다. 말이 쓰러지면 사람도 운명을 함께하게 되니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측근의 충고도 보두앵 4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첫째는 당시 '해시시를 피우는 남자들'이라는 통칭으로 알려져 있던 암살자 집단이고, 둘째는 당시 중근동의 그리스도교도들로부터 '고삐 풀린 개'로 불리던 르노 드 샤티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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