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타샤, 조지수, 지혜정원, 2011(개정신판 1)

 

 

 

 

 북미의 동부에 이슬비는 없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과장된다.

 

 

 

 도대체 어떤 국가적 분위기와 문화가 우리를 그렇게 성장시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체로 대부분은 미소가 없고 어색해하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호기심에 차고 자신감에 찬 눈빛의 청년들이다. 자기 존재에 대해 세상과 우주에게서 보상을 요구하는 눈빛의 젊음, 삶에서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듯한 그 눈빛의 젊음.

 

 

 

 특히 그 대상이 배우자일 경우 삶은 악몽으로 변한다. 머리는 단순하고 둔하고 그 마음이 자신이 받아야 하는 존중에 대한 희구로 가득 차 있는 여성은 주위에 고달픔과 역겨움을 흩뿌린다.

 

 

 

 본래 학문 간의 연계란 자기 전공에서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뭔가 할 일을 찾아 헤맬 때 생겨나게 된다. 뛰어난 사람은 전공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의 담 안에서 학위를 계속 갱신해야 한다. 그러나 '언어는 관념을 배반하고 문자는 정신을 죽인다.' 학문이 지니는 매혹적 감동과 가치는 일단 학위라는 틀에 갇히면 화석화되고 무미건조해진다. 피렌체의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논문이 요구될 때 피렌체 화가들의 심미적 역동성은 사라진다. 둔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해낸다. 만약 총명하고 심오하다면 이 같은 연구의 무의미와 무가치를 견뎌내지 못한다. 많은 천재들이 대학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이 이유이다. 그러나 둔하고 착실한 사람은 학위를 갱신해내는 데 있어 절대로 유리하다.

 

 

 

 천재들이 포기하는 시점에서 둔재들은 전진해간다. 무의미를 견디는 데에 있어서는 아둔한 사람들이 유리하다. 교수들은 둔재의 경연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본래 아카데미의 담 안에 학문은 없다. 거기에는 강의실, 교수, 연구실, 식당, 도서관 등 실로 많은 것이 있다. 그러나 학문은 없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먹고 살 길이나 가르칠 노릇이다. '학문의 아름다움' 운운은 하나의 사기이다. 아니면 감산(sentiment)이든지.

 

 

 

 근본주의자들의 신념은 하나의 오만이다. 신의 듯에 입각하여 삶이 영위되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먼저 신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신을 아는가? 유한한 우리가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해도 그 무한자의 의지를 알 수는 없다. 신의 의지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기만자이거나 오만한 사람들이다. 믿음이란 연속적인 파산의 과정이다. 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파산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사이비 신앙인이다.

 

 

 

 낚시를 위해서도 보트는 필요하다. 모든 캐나다인은 낚시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낚시를 하려면 매년 갱신되는 낚시 라이선스를 사야 한다. 이때 팔리는 라이선스가 일 년에 약 900만 장이다. 미성년자는 라이선스 없이 낚시할 수 있다. 캐나다의 성인 남자가 약 850만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마도 750만 정도의 성인 남자와 100만 명 정도의 성인 여성이 낚시꾼인 셈이다.

 

 

 

 우리 인식의 선명함은 깊은 잠의 대기이다. 우리의 잠은 죽음처럼 깊다.

 

 

 

 여자에 대한 아무리 많은 사랑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다. 역량을 갖추어야 여자를 유혹할 수 있다.

 

 

 

 우리는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무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능하기 때문에 열심히 안 하게 된다.

 

 

 

 인간의 경우 생식은 육체적 죽음은 아닐지라도 정신적 죽음을 의미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느 순간 모르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 때가 있다. 어느 순간엔가 섬광처럼 우리 가슴을 때리며 어떤 포괄적인 인식이 다가온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배경으로 여러 단편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꿰기 시작하고 하나의 인식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며 모든 것이 확연해지고 쉬워지고 자연스러워지고 당연해진다.

 그렉이 말하는 자연스러움이 그러했다.

 

 

 

 노인들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하나이다. "그때 좀 더 행복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모든 것이 노년과 죽음으로 이어지고, 내가 했던 것과 하지 못했던 것 모두가 그렇게까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삶을 희생하며 내 가 했던 분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포기했던 아름다운 아가씨는 내가 놓친 삶이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어떤 민족의 잘 교육받은 계층은 동일한 민족 내의 교육받지 못한 계층보다는, 다른 민족의 교육받은 계층과 훨씬 더 많은 동질감을 누린다. 우리는 십 수년을 교육받는 바, 그 교육의 내용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다. 따라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그 지적 배경이 비슷해지게 된다.

 

 

 

 "멜리사, 그 책이나 논문은 어쩌면 내가 미혼이었기 때문에 쓸 수 있었을 거야.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쓸 수 없어. 가정적 행복은 학자의 죽음이야. 멜리사, 아직은 더 써야 해. 당신과 행복한 채로 어떻게 책을 써?...... 사실은 누구와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 나는 가난과 외로움을 견디며 공부해왔어. 그러나 가족은 가난을 견딜 수 없어.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달아날 거야. 멜리사, 나는 학자로 살고 싶어. 의미 없지만, 그게 내 운명이야."

 

 

 

 만약 사랑이 마술이라면 내가 보여줄 사랑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이 세월이라면 나의 마음도 사랑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사건과 추억으로 빼곡히 들어찬 그러한 세월이 사랑이고, 기대되는 행복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슬프기보다 익숙해 있는 행복이 사라지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의 마음은 사랑이었다.

 

 

 

몬트리올까지는 다섯 시간이다. 그녀는 그 시빅을 끌고 갈 것이고 그 황금빛 차는 이제 웰드릭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 마음을 밝혔던 낡고 다정한 차는. 나는 그녀가 더 이상 길을 잃은 행성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사랑 때문에 두 번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미소와 춤추는 걸음걸이와 관용과 시원스러움이 그녀와 영원히 함께하기를 바랐다. 중앙도서관의 불빛이 춤추듯이 떨고 있었다.

 

 

 

 철학교수가 되기 위해 철학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은 평론가가 되기 위해 소설가가 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교수가 되기 위해 학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삶은 사건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나의 느낌과 기억일 뿐이다. 돌이키면 삶은 모두 단순하다. 삶이 풍부해지는 것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추억에 의해서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환상과 희망과 무지였다. 나는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 헛된 시도 가운데 불행했다. 누군가 가르쳐주었어야 했다. 삶이란 살아가고 있는 너 자신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구원은 없고 구원을 추구하는 너만 있을 뿐이라고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네가 있을 뿐이라고.

 

 

 

 인종차별은 무식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자기네 민족 가운데에서의 패배자들이 다른 인종을 향해 열등감을 해소하는 것이 인종차별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로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 하나의 이유는 바로 교육의 효과와 결과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그들은 교육이 얼마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교육받지 않았을 때의 인간이 얼마만큼 평준화되어 있는가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지성과 교양은 인종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에게는 인종보다는 지성이 더 중요하다.

 두 번째 이유는, 교육받은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절도와 자제를 배우기 때문이다. 그들도 인종차별적 사고를 가진다. 그러나 잘 감춘다.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자기에게 파멸적인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3월 중순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은 초조해진다. 빨리 봄이 안 오면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된다. 그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봄옷을 성급히 꺼내 입는 것은 아마도 그 오랜 주술, 표상은 실재를 부른다는 구석기의 주술을 암시적으로 믿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 귀하고 아름다운 것도 소멸할까? 그럴 것이다. 먼지가 모두의 결론이다.

 

 

 

 지성은 전진하고 감성은 머무른다. 지성이 끝없는 탐구로 지적 영역을 넓히고자 할 때, 감성은 조용히 바라보며 자연에 동화된다. 지성이 자연을 장악할 때 감성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슬라브인들은 감성적이다. 머무르고 조용히 바라본다. 운명에 순응하고 운명에 희생당한다. 그들에게 운명은 어머니이다. 어머니 품에서 조용히 슬픔을 맞는다.

 

 

 

 이것은 자연의 딸다운 주장이다. 그러나 아이가 많은 것을 해결해 주는 이상으로 많은 집착과 탐욕의 근원이지 않은가? 삶이 우리에게 많은 고통이고 아쉬움이고 불안이라고 한다면 그 아이가 우리와 똑같이 고통스러운 동요의 젊음을 보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낳은, 내가 사랑할 그 아이가. 나는 어찌어찌 힘들게 어린 시절을 빠져 나왔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빨리 늙기를 바라고 있다. 내게 이제 지치고 생명력이 말라붙은 육체만 남는다면 더 이상 꿈과 정념에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다. 절망과 불안과 무지 때문에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평화와 평온과 안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노년을 재촉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젊음을 불러들인다면 그것은 온당한 노릇인가? 이 덧없고 무의미한 지상 세계에.

 

 만약 나의 아이가, 동물적 본능으로 나와 엮어진 나의 아이가 나와 같지 않은 젊음이라 한다면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행복을 축복할 수는 없을 터이다. 냉담한 우주와 마주 서지 않는 젊음이라면 내가 그를 용서활 수 있을까? 타협과 자기기만에 안주한다면 그 아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나의 절망과 공허를 묻어버리기 위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면 그는 무엇이란 말인가? 목적을 위한 생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몸을 파는 여자만 창녀가 아니다. 성적 매력에 대한 보상이 물질적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창녀다. 어떤 여성들은 여성적 매력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스스로가 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육체적 여성적 매력에 대한 남성들의 시각과 본능에만 스스로를 맞추려는 여자들이 있다. 이러한 여성들은 그들이 어떤 고상함에 싸여 살아간다 해도 본질적으로 몸을 팔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고급 창녀들은 혼인과 관련해 법률적 구속을 원한다. 자신들의 육체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한때 화사하게 피어났던 스스로의 육체에 대한 보상을 평생을 통해 청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그녀들은 생물적 생존 양식에 고상함을 덧붙이고 있다. 창녀가 아닌 체해야 비싸게 팔 수 있다. 고귀해 보이려는 여성들의 헛된 시도는 단지 스스로를 비싸게 팔려는 시도일 뿐이다. 고귀함은 의도적 노력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고귀함은 그것 자체가 목적일 때에만 얻어진다. 목적이 있는 고귀함은 고귀함이 아니다.

 

 몸을 파는 것이 윤리적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판다. 엔지니어는 기술을 팔고, 교수는 지식을 팔고, 정치가는 기만을 팔고, 목사는 구원을 판다. 사랑이라고 보통 말해지는 것은 단지 이 교환 행위가 좀 더 영속적으로 남녀 간에 행해지는 것을 일컬을 뿐이다. 여자는 육체적 향락을 팔고 남자는 항구적 보살핌과 위안을 판다. 여기에 계약서까지 첨부되면 그것이 결혼이다. 교환이 물질적 생존의 전제 조건이다. 어떤 여자들은 날품팔이로 몸을 팔 뿐이다. 그 여자들이 창녀라고 불린다. 여기에 어떤 윤리적 문제는 없다. 날품팔이가 죄는 아니다. 단지 좀 더 고된 일일 뿐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한 상태에서는 자살하지 않아. 조증 상태에서 투신하지. 슬플 때 기쁜 음악은 위험해."

 

 

 

 그렉과 내가 거기를 휩쓸고 다닐 때 우리는 젊었고 기운이 넘쳤다. 우리는 거칠 것 없이 소란스러웠다. 이를테면 "내 안에서 여름이 잠시 노래 불렀다(Summer sang in me a little while)." 그러고 다니는 중에 나스타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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