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와 수증기, 김경주, 문학과지성, 2014
새 떼를 쓸다
찬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처럼 새 떼가
날아오른다
새 떼의 종아리에 능선이 걸려 있다
새 떼의 종아리에 찔레꽃이 피어 있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담장에 앉아 있던 새
그 자리에
다리를 두고 날아오른다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입김이다
천둥은 구름 속을
혼자 다닌다
겨울에 교실 서랍에 두고 온 개구리.
뒤집어놓은 주머니,
밤에 태양이 달다.
동네 빵집은
밀을 믿는다.
갓 구운 빵은
뽀얀 귓속말 같아.
비 오는 날의 동물원.
내 손을 놓은
풍선을 보기 위해
기린이 가만히 누웠다.
내가 어두운 운동장이라서
너는 엄지를 가만히 내 입속에 넣어주었다
엄마는 아직도 남의 집에 가면 몰래 그 집 냉장고 안을 훔쳐본다
그런 날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유 없이 화를 내던 엄마의
일기를, 고향에 가면 아직도 훔쳐보고 있다 궁금해지면
조금 더 사적이게 된다 애정도 없이
훗날 폭염은
뱀이 목젖을 허옇게 뱉어낸 곳이라 할 것이다
훗날 폭설은
달로 기어간 뱀의 거죽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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