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연금술사, 2013(1판4쇄)
붓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정상 상태에서 '두카'를 가져온다. 두카는 고통, 불만족, 혹은 평범한 불행으로 번역할 수 있다. 붓다는 그것이 인간 조건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말은 발음이 되어 소리로 나와도, 혹은 소리가 되지 않고 그냥 생각으로만 남아 있어도 거의 최면 같은 주문을 걸 수 있다. 말 속에서 인간은 쉽게 자기를 잃어버린다. 어떤 것에 단어를 갖다 붙이기만 하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암묵적으로 믿어 버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체의 표면층 뿐이며, 빙산의 일각보다도 작다.
말은 실체를 인간 마음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축소시킨다.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나'라는 생각은 다른 생각들을 그것에 끌어당긴다. 성별, 소유물, 감각을 가진 육체, 국적, 인종, 종교, 직업 등에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이다. 그 밖에 '나'가 동일화되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 남편, 아내 등의 역할, 축적된 지식이나 의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과거에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기억은 '나와 나의 이야기'로서 나의 자아의식을 다시 한 번 규정해준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끌어 내는 수많은 것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결국 내가 자아의식을 부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정하게 붙들고 있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 '나'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은 이 정신적 구조물이다.
"삶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이른바 소비 사회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은 인간이 물건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시도가 매번 실패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에고의 만족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찾고, 계속 사고 소비한다.
자신의 자아 존중감이 소유물에 좌우되지 않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민감해야 하고 솔직해야 한다. 자신을 중요한 인물이나 우월한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특정한 물건들이 있는가? 그것들을 갖고 있지 않으면 당신보다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는가? 다른 사람의 눈이나 스스로의 눈에 자기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은연중에 자신의 소유물을 암시하거나 과시하지는 않는가? 누군가가 당신보다 더 많이 갖고 있을 때, 혹은 소중히 여기는 소유물을 잃어버렸을 때, 화가 나고 불쾌해지거나,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자자의식이 위축된 것을 느끼는가?
에고는 소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질수록 자신이 더 많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고 분개하기를 좋아한다. 사람에 대해 가능한 것은 상황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즉 상황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늘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표현된다. '이 일은 일어나서는 안 돼. 나는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아.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어.' 그리고 물론 에고의 가장 큰 적은 지금 이 순간, 즉 삶 그 자체이다.
누군가에게 실수와 부족한 점을 말해 주어 바로잡는 것과 불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불만을 품지 않는 것이 반드시 나쁜 품질이나 악한 행동을 참고 견디는 것은 아니다. 수프가 식었기 때문에 종업원에게 따뜻하게 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에고가 아니다. 사실만을 말하기 때문이며, 사실은 언제나 중립이다. "어떻게 나한테 다 식어빠진 수프를 갖다 줄 수 있지?" 이것은 불만이다. 여기에는 '나한테'라는 의식이 있고, 식은 수프에 개인적인 모욕을 느껴 소란을 피우는 '나', 누군가가 잘못되었다고 만들기를 즐기는 '나'가 있다.
에고의 밑바탕에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기껏해야 가까운 관계, 새로운 소유물, 혹은 이런저런 성취들로 일시적으로 이 두려움을 덮어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흔히 말하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사실은 에고의 욕구와 필요성을 강화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당신은 상대방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중독된다. 그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진정한 사랑과는 관계가 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예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완전히, 혹은 거의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하고 남은 인생을 함께 보내기로 계약서에 서명할 때까지는 고통체가 영리하게 몸을 낮추고 누워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신은 남편과 아내하고만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고통체와도, 상대방 역시 당신의 고통체와 결혼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불행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불행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알고 싶지 않은가요?"
"이상하군요. 나는 여전히 불행하지만, 그래도 그 불행 주위에 공간이 생긴 것 같아요. 예전만큼 그 불행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요."
선에서는 이 관찰의 체험을 '초견성'이라고 부른다. '초견성'이라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존재함이며, 머릿속 목소리와 사고 과정으로부터, 그리고 그 생각이 몸속에 일으키는 감정으로부터 잠깐 동안 걸어 나오는 경험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내면에 넓은 공간이 생긴다. 이전까지는 생각의 소음과 감정의 혼란이 있던 곳에.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너 자신을 알라.'
누구도 당신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줄 수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은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신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사실 모든 믿음은 어느 것이든 장애물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심지어 깨달음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마음의 내용물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동일화를 멈추는 것이다.
"눈이 내릴 때, 모든 눈송이가 저마다 정확히 자기 자리에 내린다." 생각을 통해서는 이러한 더 높은 질서를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고, 셰익스피어가 부른대로 '이 피비린내 나는 시간의 폭군'이 결국 당신을 죽일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은 '지금'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시간의 역설이다. 무엇을 보든, 썩은 사과를 보든, 화장실 거울에 비친 당신 얼굴과 30년 전 사진을 비교해 보든, 시간의 실체를 깊이 깨닫게 하는 '정황적' 증거들이 가득하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절대 발견할 수 없다. 시간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순간, 혹은 현재의 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뿐이다. 직접적인 증거만을 놓고 말한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만이 존재하는 전부이다.
시간은 삶의 수평적 차원, 현실의 표면층이다. 그러나 삶에는 깊이라는 수직적 차원도 있다. 수직적 차원에는 오직 '현재의 순간'이라는 입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아침에 깨어나면 밤사이 꾼 꿈은 사라진다. "아, 닫지 꿈이었구나. 실제가 아니었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꿈속 무엇인가는 분명히 실제였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할 수 가 없었다.
'이 순간에 존재함'은 내면에 넓은 공간이 있는 상태이다.
보고, 듣는다. 그렇게 해서 그 상황과 하나가 된다. 상황에 맞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녹아들어가 하나가 되면 해결책이 상황 자체로부터 나타난다.
"고요는 신이 말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나쁜 번역이다." 라는 말이 있어왔다.
결국은 수단이 목적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들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격언은 이 진리를 가리킵니다.
당신은 수십 년 전 떠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각 개인의 삶-실제로는 모든 생명 형태-은 우주가 그 자신을 경험하는 독특한 방식인 하나의 세계이다.
당신은 오직 자신이 소유한 것만을 잃을 수 있을 뿐이며, 당신 자신인 것을 잃을 수는 없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은 의식의 특정한 진동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셋 중 하나가 작동하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이며 수피의 스승인 하피즈는 이 진리를 이렇게 아릅답게 표현했다. "나는 신의 숨이 통과해 흐르는 피리의 한 구멍이다. 그대여, 이 음악을 들으라."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고대 희랍어의 '안'을 뜻하는 '엔en'과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내재하는 신a Got within, 즉 '내 안에 신을 둔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단어 엔토우시아제인enthousiazien(신적 영감 상태)은 '신에 사로잡힌'의 의미이다.
어떤 것도 '미래에'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어남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 맨즈 독 - 조지수 (0) | 2014.07.10 |
---|---|
칼 라거펠트 금기의 어록 - 칼 라거펠트 (0) | 2014.07.09 |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 짐 홀트 (0) | 2014.07.01 |
고래와 수증기 - 김경주 (0) | 2014.06.30 |
프라하의 소녀시대 - 요네하라 마리 (0) | 2014.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