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짐 홀트, 21세기북스, 2013(1판1쇄)
하이데거의 책 첫 장을 펼치며 마주하게 된 질문은 바로 "왜 세상은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at all?"하는 것이었다.
"정말 불가사의한 것은 이 세상의 사물들이 어떠한지가 아니라, 바로 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명제 6.44,에서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시오랑은 이렇게 기록했다. "무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해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영원히 비참한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스스로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스피노자의 관점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사로잡게 된다.
0=1-1
이 수식은 어떤 사실을 의미하는가? 물론 1과 -1을 더하면 당연히 0이 된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사실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 과정을 역으로 돌려보자. 1-1이 0이 되는 것이 아니라, 0이 쪼개져 1-1이 된다면 어떨까. 일단 무가 존재하고 그 무는 두 개의 유로 나타나는 것이다. 분명 어떤 정반대되는 것들의 만남이다. 긍정과 부정의 에너지. 물질과 반물질. 그리고 음과 양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해석을 내놓은 것은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화학자 피터 앳킨스Peter Atkins다.
어린아이들은 때때로 공집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을 낸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는 집합이 어떻게 하나의 집합이 될 수 있느냐며 묻기도 한다.
베일리는 자신의 존재가 지닌 우연성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연성은 비단 한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게 같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저 하늘의 은하수부터 파리의 에펠탑까지, 지금 집 어딘가에서 잠이 든 개로부터 노트북 컴퓨터 마우스 패드 위에 쌓여 있는 먼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 말이다. 이러한 각각의 존재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탄생했지만, 만일 우주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하나의 세상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실체에 대한 그의 관점은 나란히 존재하고 있는 여러 세상들의 거대한 조화, 즉 다중우주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다중우주는 도이치에게 스윈번이 믿고 있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먼저 이른바 '제1원인'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세상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어떤 사건에 의해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것 참 가망 없이 좁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어떤 일이 항상 시간적으로 먼저 있었던 일에 의해 벌어진다는 생각은 사실 아무런 논리도 설명도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종교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올바른 일을 하면 올바른 사람이 되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한 사람이 된다. 그렇지만 올바른 사람이 악한 일을 하게 되면 그게 바로 종교다"라는 말을 통해 종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보이고 있는 와인버그에게 보수적 침례교의 본산쯤 되는 텍사스 같은 곳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정형화된 근본주의 신자들과 달리 이곳의 몇몇 침례교 신자들에게는 유니테리언 교도와 구별이 안 될 정도의 자유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열렬한 플라톤학파 학자들에게 신을 향한 기원은 불필요한 미사여구일 뿐이다. 수학 스스로도 우주를 만들고 유지할 능력이 충분한데 신과 같은 창조주를 누가 필요로 하겠는가. 수학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세상 자체가 수학처럼 느껴진다.
플라톤 학파가 믿고 있듯 수학적 실체가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반드시, 그리고 영원히 존재해야한다.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신은 완벽한 존재에 대한 윤리적 필요성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레슬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 커다란 상상 속에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숫자의 무한한 정신입니다. 그 정신은 각각 알만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알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같은 이 우주의 구조이고요."
러셀은 이렇게 주장했다. "각각의 잔학한 행동들은 영원히 우주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부터 위대한 헤겔의 변증법이 시작된다. 정正, thesis ; 실체는 순수한 존재다. 반反, Antithesis : 실체는 무다. 合, Synthesis : 실체는 생성이다.
그는 수학이 그렇게 복잡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놀라움을 토로했다. 수학자들이 말하길 수학의 80퍼센트는 무한에 대한 문제라고 했다는데, 그는 무한이 하나 이상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공포에 질렸다는 것이다.
쉬운 질문이란 바로 무에 대한 것이었다. 파핏은 무는 논리적으로 분명한 개념이라고 믿고 있었다. 분명 그는 무란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무란 분명히 한 번은 존재했을 것이다. 아무런 정신도, 원자도,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말이다."
노직이 생각하는 방향에서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단순하다. 세상은 무인 동시에 유이다.
그리고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장 폴 사르트르도 동의했듯, "무는 늘 존재와 함께한다."
그도 앨런처럼 영원불멸의 무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으며, 섹스가 이에 대한 심리학적 보호막이 되어준다고 확신했다. 분명, 업다이크는 무존재에 대한 자신의 공포심이 자신의 육욕적 욕망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1969년 자신의 신념을 담은 시 '미드포인트Midpoint'에서 이러한 문제를 간결한 수학적 형태로 표현했다.
성욕ASS=1/고뇌ANGST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는 말을 통해 이와 비슷한 면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러시아의 작가 이반 곤차로프Ivan Goncharov가 쓴 위대한 동명 소설 <오블로모프Oblomov>의 반영웅적 주인공 오블로모프는 자신의 친구 스톨츠에게 지혜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사는 것이 바로 목적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항진명제'가 아닌가.
따라서 나의 존재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의미도 목적도 필연성도 없다. 그런 모습을 전혀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나는 우연하면서도 부수적인 존재다. 나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불가지론적 태도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더 좋다는 믿음이 일반적으로 퍼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에게 감사하도록 교육받는 것이다."
자신의 저서 <인간 본성론Treatise of Human Nature>에서 흄은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가장 가까이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접근했을 때, 나는 항상 뜨거움이나 차가움, 사랑이나 증오, 고통이나 희열 등의 어떤 특별한 자각이나 다른 것을 만나곤 했다. 나는 이런 자각 없이는 결코 언제라도 나 스스로를 알아차릴 수 없었고 자각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었다. ...... 만일 누군가 진지하고 편견이 없는 시선으로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분명 고백하건데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나겔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내부로부터 나의 존재는 그 스스로 서 있는 가능성들의 우주처럼 보인다. 따라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계속될 필요 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부분적으로 감춰져 있는 자아 개념이 토마스 나겔이 죽고 나도 그를 따라서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과 충돌할 때,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것이야말로 무의 아주 강력한 형태다. ...... 내가 무의식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사실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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