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인간학, 나카지마 요시미치, 다산북스, 2016(초판 1)


 


 


 


 


 


 


 어째서일까? 왜 그들은 이토록 멍청한데 태연히 지낼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 행동의 복잡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도록 매일 훈련하기 때문이다.


 


 


 


 범죄와 그 동기는 본인조차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뒤엉켜있으며, 또 그것을 "XX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몹시 수상쩍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기에 발을 들여 놓으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그런 센스는 이상하게 발달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 그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여기저기서 들여오는 안전하고 무해한 의견만을 받아들여 그것을 구관조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는 이런 인간을 '고지식한 정신esprit de serieux' 이라고 칭했다. 니체가 말한 '착한 사람 = 가축의 무리'와 거의 비슷한 뜻이다. 그는 근원적 자유로부터 눈을 돌리고 항상 정해진 대로 생활하려 애쓴다. 오늘도 회사에 가는 이유는 회사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일이 헛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일은 헛될 리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집에 돌아가는 이유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정신이란 스스로에게 '왜 오늘도 회사에 가는가, 왜 오늘도 집에 돌아가는가?'라고 묻기를 멈춘 사람이다.


 


 


 


 사태를 자세히 관찰하면 알 수 있듯 자유의지와 우연 사이에 뚜렷한 선을 그을 수는 없다.


 


 내가 모든 단어를 매번 완전히 자유롭게 골라서 말했을 리 없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면전에 두고 우연히 입에서 자연현상처럼 온갖 욕설이 흘러나왔을 리도 없다. 진실은 둘 모두를 합친 것이다. 물론 그 둘의 비율은 알 수 없지만.


 


 


 


 착한 사람이 타인에게 상냥한 이유는 자신도 타인에게 상냥한 대접을 받고 싶기 때문이며, 그래야 자신이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냥함이란 누구나 알기 쉬운 형태의 상냥함, 어디까지나 그 사회에서 용인되는 형태의 상냥함이다. 그러므로 노인에게는 자리를 양보하고 장애인을 대할 때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사회의 규칙에 어긋나거나 상냥함으로 인해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질 경우, 이를테면 성추행범에게는 상냥하게 대하지 않으며, 학급에서 미움받는 아이, 따돌림 당하는 아이에게도 상냥하게 대하지 않는다.(상냥하게 대하면 자신이 따돌림 당활 수 있으니까.)


 


 


 


 공정gerecht이라는 단어는 복수gerachi라는 단어와 맞닿아있다. 공정함을 추구하는 약자는 강자에게 복수하고 싶어한다. 강자를 냄새나는 시궁창 속에 처넣고 자기들과 같은 더러운 무리로 개조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전혀 평등하지 않으나 '약자=착한 사람'에게는 평등처럼 구미가 당기는 말이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은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 과연 그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까?


 확실히 권력자라도 사람을 죽이면, 강간하면, 불을 지르면, 횡령하면, 물건을 훔치면 범죄자가 된다. 법은 대개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를 규정하기 때문에, 각 개인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에 관해서만 평등하다.


 다시 말해 법은 단지 그뿐이다. 그 외의 수많은 일은 모두 불평등하다. 착한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다. 아니 알면서 모르는 척한다.


 


 


 


 '모두'란 누구인가? 가장 수가 많고, 가장 생각을 하지 않고, 가장 둔하고, 가장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 자들, 즉 가장 약한 자들이자 그래도 괜찮다고 정색하는 자들이다.


 


 


 


 모두가 괴로워하는 것은 올바른 괴로움이고, 모두가 바라는 것은 올바른 바람이며, 모두가 그만두기를 바라는 것은 즉시 그만둬야 한다. "모두가 곤란해 하잖아요!"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그 이상함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착한 사람이다. 모두가 틀릴 때도 있는데, 아니 모두의 생각은 대부분 틀린데, 그런 진리가 머릿속을 스치는 일조차 없다.


 


 


 


 대중은 진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 쇠렌 키르케고르, [내 저작활동의 시점]


 


 


 


 도덕적으로 변하는 것은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 도덕에 대한 복종은 군주에 대한 복종과 마찬가지로 노예적일 수도 있고, 잘난 척, 이기심, 체념, 음울한 열광, 사려 없음, 절망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다.


   - [아침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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