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달콤한 독약, 조중걸, 지혜정원, 2014(초판 1쇄)




 이제 결론을 위해 학문적 탐구 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하자. 누군가가 “나는 어떤 철학에 대한 탐구에 있어 그 철학자의 삶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철학도 그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한 그의 삶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그의 철학은 그의 삶에서 연역된다.” 키치는 이렇게 시작된다. 




 즉 키치는 아름다움이나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아름답게 보이거나 진실인 것처럼 보이기를 추구한다. 




 사르트르가 인간에게는 자신을 창조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고, 앙드레 말로나 생텍쥐페리가 행동 이외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보여 줄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거나, 카뮈가 자유와 반항과

열정만이 우리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이와 같이 우리 삶은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며 삶은 살아가는 나의 실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삶을 위한 삶’의

교의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삶과 예술은 강인하고 자기포기적인 결의를 전제한다. 삶에는 어떤 주어진 의미, 어떤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도 없다고 할 때 이것을 견뎌낼 스토아주의자가 되기는 진정 어렵다. 




 지적 탐구의 노고는 “패턴의 발견the discovery of pattern”에 의해 보상받는다. 패턴에의 탐구에서 자유로운 학문은 없다.




 인식론적으로 정의할 때, “키치는 그 확실성을 보장할 수 없는 개념, 혹은 패턴에 먼저 실재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기초로 작동하는 활동”을 뜻한다. 




 세계는 역동적인 운동과 변화에 처해 있었고, 다윈은 이 신념을 “자연 세계에는 간극이 없다There is no gap in nature”라고 표현한다. 




 “한 그루의 소나무나 한 마리의 고양이”(카뮈)는 부조리 때문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이성이 불러들인 의식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자기 삶으로부터 키치를 추방한다는 것은 거듭된 절망과 파산을 자기 운명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엔 커다란 용기와 결의가 필요하다. 갱신의 과정밖에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누가 이것을 택할 용기가 있겠는가. 세계의 건설이 소멸을 전제할 때,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분투하는 나”밖에 없다. 그리고 시간은 현재밖에 없다. 따라서 “순간을 사는 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바와 같이 종교는 “무식한 사람들의 철학”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불행한 사람들의 아편이다.” 왜 예술에 이러한 것이 없어야 하는가. “예술이 있으면 

신 없이 죽어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니체가 아니었던가.




 ‘예술 없는 예술’이 키치적인 것처럼, 여기에는 ‘상품 없는 상품’이 키치가 된다.

 이것은 매우 슬프고 역겨운 상황이다. 이러한 광고가 유효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실증주의 시대 이래로 상품과 그것이 조성하는 아우라는

분리되었다. 상품은 단지 상품일 뿐이다. 그것이 스스로의 효용 이외에 다른 어떤 동기로 선택된다면 우리의 선택은 유용성이라는 일차성에서 허영과 감상이라는 이차성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이차적 눈물이다.

 모든 사랑과 진실과 미가 “이차적 눈물”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처럼, 키치적 상품에서는 본래의 사용가치가 이차적 작용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타자를 대신하는 것은 진정한 실체가 아니라 키치라는 사실이다. 즉, 키치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키치라는 사실을 알고, 무의미와 절망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유희적 기회로만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 마리 토끼가 절망을 잊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 토끼를 사냥하는 순간만은 절망을 잊을 수 있다.”(파스칼) 키치가 절망을 잊게 할 수는 없지만, 키치를 즐기는 것은

절망을 잊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간은 어차피 자연이 되거나 신이 되거나 줄 중 하나였다.




 최초의 생명은 단지 우리의 요청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물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수학은 최초의 공리와 공준을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증명 불가능하다. 그 최초의 공리들도 단지 현재의 수학이 존재한다는 것으로부터

요청된 것일 뿐이다. 




 진실보다는 행복이 더 나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기만 속에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삶에 온전한 값을 치르지 않는다. 우리는 삶이 공짜이길 원한다. 




 헤밍웨이는 “좋은 술에는 감정을 섞지 말라. 그것은 술의 풍미를 해친다”라고 말한다. 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서는 감정 과잉이나 의미부여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왜 무의미한 이 우주에 거짓 의미를 불러들이려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규약이라는 새장 안에 갇혀 있다. 새장에는 어떤 곳에도 외부로 향하는 문이 없다. 




 에드가 모렝Edgar Morin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의 행성을 떠맡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 행성에서 개별자로서의 무한대의 자유를 지닐 수는 없다.




 흘러넘치는 세계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와 거기에 연결된 인간의 운명을 지적으로 설명해 왔던 합리주의는 경험론의 공격과 회의주의에 의해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이제 우주는 갑자기 낯선 것이 된 것이다.

실존주의자는 세계에 대해 의미를 요구했지만, 세계는 그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무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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