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4주년을 앞두고 적당한 레스토랑을 물색중이다.

 

누군가를 사랑한지 고작 4년이 된 것을 가지고 그것이 대단한 것인양 기념을 한다는 것도 좀 뻘쭘하다.

 

어머니와 자녀는 서로를 사랑한지 40년이 되어도 그것을 가지고 딱히 기념하진 않는다.

(생일은 논외로 치고 싶다. 나는 태어나자 마자 모자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의 그것은 오히려, 내 분신, 내 안에서 나온 무엇에 대한 사랑과 애착일 것이다.)

 

반면, 서로가 완벽하게 남인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지 4년이 되어간다는 건 그 자체로 작은 기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4년이어서 놀라운 게 아니라

 

완벽하게 남이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 매 순간, 새로운 매일이 모두 놀라운 것이라 생각한다.

 

4년에서 하루 빠진 사랑과 4년을 채운 사랑의 하루 차이가 놀라움과 대단함의 차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서로를 사랑한 두 사람이, 서로의 이기심을 어떻게든 참아내고 부여잡고 뒤섞어내며 서로를 오랜 시간

 

버텨왔음을 기념하는 방법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보내는 한끼의 식사시간이어야 한다는 것도

 

동의되지 못한다.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일을 타인을 위해 기부한다거나,

 

보다 뜻 깊은 행위, 보다 나다운 행위로 기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결국 기념일이란 '의미놀이'이고. '의미'를 더 '의미있게 하는 행위'를 통해

 

'의미'는 더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로를 사랑해온 4년의 시간을 기념해서 4시간의 사랑나눔. 사랑기부를 한다거나.

 

4주년이니까 4주동안의 어떤 프로젝트를 기획해본다거나...

 

그렇다면 4주년을 맞아 4주년을 기념해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와인을 마시고 어쩌면 선물을 교환하는

 

아주 보통의 커플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하는 걸까?

 

일단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이런 이벤트가 곧 사랑의 증명이라고 믿는 사람이거나.

 

아무 것도 안 했다가 나중에 후환이 두렵다거나.

 

어쨌든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게 당연한가보다 하는 것은 아닐까.

 

일단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고안해낸 방식의 '기념식' '기념행위'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다 시장과 마켓과 방송과 언론이 만들어낸 방식이다.

 

무인도에서 만나 무인도에서 사랑에 빠져 무인도에서 사랑을 키워온,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는 커플이

 

서로를 기념하는 방식은 뭘까?

 

그것은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획기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주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고.

 

우리가 기념일을 챙기는 이유, 또 챙겨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잊지 말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까. 만난 날, 만나온 시간도 잊을 수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4년 전 얼마나 우리가 설렜었는지'도 잊을 수 있으니까.

 (사실 그걸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긴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해, 연인이,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 공기나 물 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언제 물과 공기를 처음 만났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그게 없으면 죽으니까.

 

그것은 그런 정도의 존재니까.

 

반면 연인은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대체'가 되어진다. 다른 연인으로. 다른 사람으로. 다른 인연으로.

 

그런 서글픈 잠재력 때문에 '잊지 않고자 하는' '놓치지 않고자 하는' 행위를 진화시켜온 것일지도 모른다. 우린.

 

우린 알고보면 '이별의 가능성' 때문에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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