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장강명, 문학동네, 2016(1판 6쇄)
우주에는 시작이 없어. 남자가 대답했다. 우주는 마치 볼펜과 같은 거야. 그냥 하나의 덩어리야. 볼펜은 길쭉하게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볼펜에 양끝이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사실은 볼펜이 공기와 닿는 모든 면이 다 볼펜의 끝이야.
그 모든 접점에서 볼펜이 시작하고 끝나는 거야. 우주도 비슷해. 시공간연속체가 무와 만나는 지점이 있지.
운동장이 쓸쓸했다.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운동장은 그 학교에서 가장 표정이 풍부하고 가장 인간적인 존재였다. 살아있는 학생들보다 더. 학생들은 학교에 있을 때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나 벌을 더 닮았다.
그래, 먼저 온 미래. 미래가 어디에 먼저 오느냐. 부자 동네에 먼저 와요. 트렌드라는 게 말이에요. 절대로 가난한 동네에서 부자 동네로 거슬러올라가는 법이 없어요. 항상 부자 동네 문화가 가난한 곳으로 퍼져요.
학습만화라는 거 자체가 되게 웃겨. 공부 잘하는 애한테는 엄마들이 이런 책 안 사줘요. 공부 못하는 애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시장이야. 사 보는 애들도 이 책으로 공부한다는 생각은 안 해. 정작 애들도 이 만화를 진짜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 엄마가 돈 주고 사주는 책 중에서는 그나마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도서관이라는 곳도 직장으로서는 학교와 비슷한 곳인 듯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협상을 하고, 때로는 싸움도 각오해야 하는 그런 일터는 아닌 것이다. 착하고 얌전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착하고
얌전하게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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