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된 일이다.

사회 생활을 막 시작한 20대 직작인의 눈에 '선배'들은 왠지 모르게 독특하고 약간은 신비하며 관찰의 대상이기 마련이다. 

 

그중에서 비교적 나이 차이가 덜 나는 선배부터 순차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는데,

팀장은 결국 가장 늦게 가까워지거나 끝내 가까워지지 못할 대상이다.

 

내가 첫 직장생활을 시작할 당시 우리 팀에는 대리, 과장, 차장, 부장, 국장까지

다양한 선배들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결혼한 차장 부장님들이 집에 갈 의지가 전혀 없었다.

 

회사 사람들과 술 마시러 가거나, 

회사 사람들과 야근하다가 술 마시러 가거나

회사 사람들과 게임하다가 술 마시러 가거나,

회사 사람들과 술 마시다 게임하다 집에 가곤 했다.

 

모두가 다른 약속이 있어 혼자 남을 경우

혼자 게임을 하다 밤늦게 집에 가거나 기어코 어딘가의 술자리에 불려가곤 했다.

 

어쩌다 하나면 그분만의 특성이려니 하겠는데

결혼한지 어느 정도 경력이 된 분들, 그중에서도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그런 특징을 보이니

나도 모르게 일반화 하곤 했다.

결혼하고 자식 낳고 10년 쯤 되면 저런가 부다 하고.

 

그들이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집에 일찍 가면 부득이하게 '시달릴' 것들이 싫었던 것 같다.

게임도 하고, 술도 마시고, 수다도 떨어야 하는데, 집에 가면 '가장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드라마 대사로도 종종 쓰인 적 있고, 회사일을 열정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분명 가족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 마련이다.

"회사가 중요해, 가족이 중요해."

내가 옮긴 다른 회사에선 업무 강도가 무척 높았다.

그리고 팀장을 비롯해 야망가들이 많았다.

우리팀만이 아니라 회사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였다. 

거기선 일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일 못하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내가 있던 팀의 팀장은 업계에서 유명한 네임드였고,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본인은 물론 팀원들을 거침없이 푸시하는 사람이었다.

그 속에서 나같이 어린 후배들은 빠르게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일을 잘하려 애썼고

어느 순간 나보다 일 못하는 선배는 무시하는 경향을 띄기도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들일수록 그 회사에서 힘들어했다.

정말 눈에 핏발 세우고 월요일에 출근해서 금요일에 퇴근할 작심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경쟁하다 보면

(실제로 회사에 수면실이 있었고 회사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둘 중 하나가 된다.

끝까지 경쟁해서 인정받는 실력자가 되거나, 어느 순간 경쟁을 단념하고 적당히 일하는 쪽이 되거나.

신기하게도 동일한 과제를 받고 준비해온 페이퍼만 봐도 그가 어느 쪽인지가 보이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가 "안정적 직장"을 지니길 바란다.

여기서 안정적 직장의 의미는 망할 일 없고, 연봉도 나쁘지 않은 회사이면서

가족과 일의 밸런스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 같은 회사이다.

가족을 위한 복지도 괜찮고, 말로나마 가족의 가치와 워라벨을 이야기하고,

야근과 주말 근무 수당이 나오고, 휴가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제대로 시스템이 갖춰진 회사.

 

그런데 이건 배우자의 입장이고, 당사자의 입장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내가 내 일에서 탑이 되거나 납득할만한 성취를 내기 위해 불태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회사라는 피라미드에서 자리 뺏기 싸움(혹은 뺏기지 않기 싸움)을  위해 오지게 일을 해야 될 수도 있다.

저마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오늘도 직장과 가족 사이에서 발란스를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는 의외로 책임감이 강해서, 그 사이에 끼이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족과 일, 두 개의 직무를 모두 뛰어나게 해내는 사람을 롤 모델로 찾아본 적도 있는데 거의 없었다.

그나마 팀장 이상 위치가 되면 그런 분들이 몇 보였다.

그분들이라고 항상 가족과 일 모두를 뛰어나게 케어했던 것이 아니라, 

일단 회사 내 경쟁에서 계속해서 가치를 보이고 승리한 뒤 '중간 관리자'가 되었기에 가족을 돌보는 시간이 더 늘어난 경우다.

 

오늘은 집에서 야근을 하기 위해 일부러 조금 빨리 퇴근했다.

러시아워를 피하면 길에 버리는 시간을 30분 가량 줄일 수 있고

그러면 동일한 시간 일을 하더라도 '내 시간'을 30분 더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눈에 해치워야 할 '집안일' 몇 가지가 보인다.

가습기 필터를 세척물에 담가놨는데, 헹궈서 가습기를 재설치해야 하고

어제저녁 먹고 안 치운 설거지도 해야 한다.

택배 온 것도 뜯어서 정리해야 하고,

분리수거 쓰레기 모아놓은 것도 오늘은 내다 버려야 한다.

별 것 아니지만 남아있는 오늘 중 내가 쓸 수 있는 내 시간이 자꾸 마이너스가 되는 게 스트레스다.

 

먹고 나면 똥이라고, '일하는 시간'이나 '집안일하는 시간'이나 '내 시간'이나

지나고 나면 그냥 어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 시간'의 비중이 높아지는 날은 더 성공한 날이라는 기분이 든다.

아마 첫 직장에서 게임을 그토록 즐겨하던 차부장님들에게 그 시간은 내 시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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