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김개미, 문학동네, 2020(1판 5쇄)
한여름 동물원
안녕, 기억에 사로잡힌 앵무새야
안녕, 검은 바위에 꽃핀 이구아나야
안녕, 편도선이 부은 플라밍고야
안녕, 환청에 들뜬 원숭이야
안녕, 돌을 집어먹은 코끼리야
안녕, 눈동자에 시계를 가둔 고양이야
안녕, 버저를 눌러대는 풀매미야
안녕, 안녕, 안녕, 오늘의 태양을 기억해두렴
죽기도 살기도 좋은 날씨란다
평생
당신에게 저주를 퍼붓다 끝날 줄 알았어.
알코올이 당신에게 밤낮으로 기름을 부어 당신은 전쟁 없는 평화로운 고향에서도 처절한 난민이었어. 황폐한 당신이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에 끌려다닐 때도 나는 당신을 동정하지 않았어. 당신은 내 어린 날의 무지개를 훔쳐갔고 내가 사는 집에는 좀처럼 해가 뜨지 않았어. 당신이 알아? 고드름조차 떨어지지 않는 혹독한 겨울을. 옷 보따리를 껴안고 구부린 척추에 붙어 숨막히는 아이를. 나는 꿈을 꿀 때조차 깨어 있었어. 문밖에 귀를 걸어놓고 언덕에 올라와 쓰러지는 귀신 같은 바람 소리를 들었어. 불안에 들떠 잠 못 드는 가랑잎들의 웅성거림을 들었어. 부엉이 울음소리가 가슴 밑바닥에 쌓이고 나는 주먹을 쥐었어. 평생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란 글자를 새기고 또 새겼어.
짐승 같은 당신 목소리가 언덕에 와 찢어지고 나는 용수철처럼 꿈에서 튕겨져나왔어. 위경련을 앓는 엄마에게 누비옷을 입히고 식은 방에서 잠든 동생들을 흔들어 깨웠어. 우린 쥐새끼처럼 눈만 껌뻑거렸어. 세 살짜리 막내도 여섯 살짜리 여동생도 여덟 살짜리 나도 깡마른 엄마도 심장 소리 하나만은 거인 같았어. 우린 침묵으로 입을 꿰매고 뒤란으로 갔어. 굴뚝 뒤로 갔어. 벌통 옆으로 갔어. 당신을 저주할 때에도 별은 아름다웠고 우리는 북두칠성이 지워질 때까지 바위에 앉아 있었어. 엉덩이가 스펀지같이 푹신해지고 관절이 고목처럼 얼어붙으면 아침이 왔어. 어떤 날은 눈이 오기도 했는데 그땐 머리에 하얗고 따뜻한 털모자를 쓸 수 있었어.
평생이 걸려서라도 당신을 용서하고 싶어.
즐거운 청소
언니, 저기 좀 봐
먹구름이 우물을 채웠어
우린 이제 구름을 길어 먹는 거야?
아이 웃겨라
개새끼는 왜 저래?
엎어진 대접 안에 뭐가 있다고
열심히 대접을 뒤집으시네?
손도 없는 주제에 지겹지도 않나?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엄마가 알면
언닌 종아리를 맞을 거야
도대체 왜 빨래를 안 걷는 거야?
오늘도 안 걷으면
옷이 녹아 없어질지 몰라
언니가 빨래 담당이란 걸 잊지 좀 마
그런데 언니, 어젯밤에 비 왔어?
아궁이에 잿물이 한 동이나 고여 있어
킥킥, 행복한 건 쥐 가족들뿐인가봐
고양이만한 간을 달고 뛰어다녀
언니 언니, 저기 좀 봐, 장롱 옆
얼룩이 꼭 시조새 같아
싫어 싫어, 거긴 싫어
이불 밑의 엄마는 하나도 안 궁금해
죽었으면 어쩌려고 자꾸 나보고 보래?
높은 옥수수밭
옥수수밭이 산기슭까지 이어지고 동생과 나는
나무뿌리가 드러난 절개지에 손을 넣었다
깊이 집어넣을수록 젤리같이 고운 황토
우리는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궁전을 짓고 병원을 지었다
노을이 우리의 손목에 붉은 수갑을 채우면
오솔길과도 같은 수백 개의 옥수수밭 고랑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노루처럼 귀를 세우고 떠들어댔다
뻐꾸기 울음소리는 옥수수밭을 넘어가지 못해
여긴 세상 끝이야
아무도 우리를 찾지 못해
뭐 하는지도 몰라
내가 너를 먹어도
네가 나를 죽여도
맞아, 우리 엄만 맨날맨날 누워 있어
그게 엄마의 일이야
천장을 쳐다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지만
울지는 않아 죽지도 않고 자지도 않아
그러니까 우린 우리 마음대로 해도 돼
집에 안 가도 돼
지금 여기서 죽어도 돼
멀리서 저녁연기가 피기 시작하면
하얗게 늙은 엄마가 구렁이처럼 구불구불
옥수수밭 고랑을 기어올까봐
살아 있는 귀신이 우리 이름을 부를까봐
생기지도 않은 젖가슴을 후벼 꺼냈다
절개지에 누워
놀라지 마
비행기는 찬호네 논에 떨어졌어
네 머리에 떨어진 건 흙덩이야
더러워지는 걸 겁내지 마
등짝에 뭐가 기는 것도 겁내지 마
무서운 건 그런 게 아니야
아무래도 넌
턱이 고장난 것 같아
입을 다물지 못하잖아
먼지는 먹어도 돼 해롭지 않아
아직 따뜻한 햇살이 네 배를 쓰다듬어줄 거야
잠들어도 돼
머릿속에 참나무 잎이 쌓이고
돌멩이가 꿈속으로 떨어지면 어때
걱정하지 마
한 대접 물을 마셨는데
어떻게 아침까지 자겠니
너도 궁금하지?
왜 저녁이 오기도 전에 밤이 오는지
왜 우리는 지은 죄도 없이
산으로 도망질을 치는지
왜 엄마는 볼일을 다 보고도
변소에서 나오지 않는지
누가 우리를 여기로 불렀을까?
네 그림자를 깨워 물어볼까?
비행기처럼 우리도 여기서 폭발할까?
그럼 다신 배가 아프지 않겠지
헛배가 부르지 않겠지
오늘은 울지 마
돌을 뛰어넘는 쥐들을 막아줄게
모래에 묻힌 네 더듬이를 찾아다줄게
너는 바위 밑에서도 눌리지 않는 아이야
너는 나의 곤충이야
정오의 축복
오늘은, 망해버린 회사의 상표를 단 냉장고가
갑각류 껍데기 씹는 소리를 내는 계절
어제 남긴 식은밥이 누룽지가 되어
양푼 안에서 딴딴해지는 계절
소리 없이 허공을 박음질하는 선인장이
흙속에 파묻은 대가리를 살찌우는 계절
킬라를 마신 파리가 두 눈 부릅뜨고 뱅글뱅글
죽을 때까지 팽이처럼 돌아가는 계절
여긴, 속이 허한 아이들에게 점심과 함께
욕과 노란 먼지까지 제공하는 특별한 별
트램펄린 위에 올라가 창자가 끌려나오도록 뛰고 또
모락모락 담배로 안개를 만들어도 시간이 남는 별
때때로 주먹 대신 머리로 벽을 들이받아야 하는 별
열 살 때까지 엄마를 언니로 알고 사는 희한한 별
스무 살도 안 된 소녀들이 서둘러 늙어가는 별
자신보다 빨리 자라는 배때기 앞에서 공포에 떠는 별
안다, 머리통은 열쇠 없는 자물통이라는 것
아무리 들쑤셔도 고통은 껴낼 수 없다는 것
머릿속으로 자라는 뿔은 뽑히지 않는다는 것
울음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정오
돌멩이가 제 그림자에 뼈를 만드는 시간
병든 개가 턱뼈를 덜그럭거리며 운동장을 뛰는 시간
유리창에 모여든 아이들의 치아에서 간혹
새까만 침묵이 굴러떨어지기도 하는 시간 축복의 시간
천변에 버려진 노을
너와는 상관없이, 저녁이 오고
노을은 면도날 입에 물고
서쪽 하늘을 씹어댄다, 알아?
너와는 상관없이, 바람이 불고
톱날에 목을 허락한 미루나무가
한 달째 냄새를 끄집어낸다, 알아?
너와는 상관없이, 자전거가 달리고
바구니에 담긴 개가 1초도 얻지 못하고
까만 눈동자를 흔들어댄다, 알아?
너와는 상관없이, 하루살이가 날고
노을 속으로 끌려가며 내 검은 동공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알아?
너와는 상관없이, 나는 천변에 나와
아가미 터지게 노을을 채워넣는
눈먼 잉어를 구경한다, 알아?
무료한 아이들
수업이 끝나도 우리들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둘씩 셋씩 모여 지루함을 나눠먹어야 하니까요. 바이올린을 껴안고 첼로를 껴안고 거울 앞에 앉아서 누구나 다 아는 비밀 얘기를 속닥거려야 하니까요. 입김으로 거울을 포장해놓고 킁킁킁 냄새를 맡아야 하니까요. 비밀이 소문이 되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당신도 같이 놀아보지 않을래요? 맛있게 맛있게 맛있게 냠냠냠.
공부가 싫어도 우리들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지우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볼펜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걸 주먹 위에 올려놓고 하루종일 빙글빙글 돌릴 수 있으니까요. 예상하셨겠지만 우리는 이제 괄호가 무섭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숫자를 써넣은 다음 구름과 풍선이 두둥 떠다니는 머리통을 감싸쥐고 신음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목요일 저녁의 엄마처럼.
미쳤어요? 무엇 때문에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겠어요? 칼로 그을 책상이 여기 있는데요. 하루종일 걷어차도 멀쩡한 의자와 함께 말이에요. 요즘엔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공짜 점심까지 준다니까요. 잔소리 하는 사람도 없고 밥맛이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찔러댈 때마다 자지러지는 옆구리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거예요. 우린 그저 딴청을 부기리만 하면 돼요. 졸린 개처럼 멀뚱멀뚱.
맞아요. 호기심이 왕성할 때예요. 우린 궁금할 따름입니다. 왜 아무때나 한숨을 푹푹 쉬게 되는지, 왜 돌멩이를 걷어차게 되는지. 왜 사타구니가 손을 끌어당기는지. 왜 심장은 다리가 아닌지. 왜 눈을 감아도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지. 왜 잠들어도 죽지 않는지. 그렇죠. 궁금증이 키보다 빨리 자라죠. 매일 한 가지씩 시시한 것들이 생겨요. 그러니 공벌레처럼 혼자서도 똘똘똘 뭉칠 수밖에요.
열아홉
머리통이 그대로 익어 한 덩어리 수박이 될 때까지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다
막대기로 교문을 때리는 아이들
텅텅, 쇳소리가 산을 때리고 돌아오고
구름은 파란 통 속에 빠져 출구를 찾아 헤맨다
고치 속의 누에가 되고 싶다,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어지러운 꽃과
악령처럼 찌그러지는 등고선
여름이 되기 전에 바다에 뛰어들었으니
이번 여름은 필요치 않다, 나는
나를 파기하고 싶다, 아니
폐기하고 싶다,
종일 머릿속에서 뛰어노는 미친개
너도 이 세계를 뒤집어엎고 싶으냐,
저 평온한 하늘의 낯짝에
모래를 끼얹고 싶으냐,
창자에 든 비명을 끌어낸다
엄마는 왜 아파야만 하는가,
왜 중풍이나 지랄병처럼
누구나 아는 병을 앓지 못하는가,
이마가 터질 듯이 피가 몰린다
따라라라 따라라라, 휴일에도 시간 맞춰 울리는
수업 종소리
어둠 속으로 간 누에는 얼마나 고독할까
감자꽃은 수줍음 많은 별
노을이 감자꽃을 물들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유 없이 배알이 꼬였다
지겟작대기로 뱀을 희롱했다
우연히 우리 앞을 지나가던 뱀은
영문도 모른 채 찔리고 피 흘리고
돌에 짓찧이는 최후를 맞아야 했다
우리는 밤에도 자지 않았다
들고양이처럼 밭둑길을 오가며
술래잡기에 열을 올렸다
찾다가 지쳐 화가 난 술래가 돌을 던져도
우리는 감자밭에 이마를 심고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의 별을 위해 어둠에 묻히는 감자꽃
누군가 오줌이 마려우면 우리는 단체로
깝대기를 까고 앉아
별을 올려다보았다
잡힐 듯 내려와 있던 별들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우리는
벌들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우리의 심장이 들쥐의 것인 줄 모르고
여우처럼 떠들어대고 늑대처럼 뛰어다녔다
우리가 가진 건 인디언 아이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
감자처럼 뽀얗게 터지는 속살
우리는 무더기 별빛을 털어먹으며 자랐다
뱃속에서 기생충이 홰를 쳐도
몇 달씩 엄마가 돌아오지 않아도
아버지가 약을 먹고 눈을 뜨지 않아도
우리의 놀이는 멈추지 않았다
우는 법을 몰랐으므로
우리는 위로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 작고 외진 별에 밤낮으로 별이 떴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젝트 헤일메리 - 앤디 위어 (0) | 2022.02.21 |
---|---|
파운데이션의 끝 - 아이작 아시모프 (0) | 2022.02.10 |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0) | 2022.01.19 |
이름 뒤에 숨은 사랑 - 줌파 라히리 (0) | 2022.01.06 |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 오후 (0) | 2022.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