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어크로스출판그룹, 2021(초판 18쇄)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를 운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이올린을 운으로 배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와 ‘실용적인practical’이라는 단어는 오직 사전에서나 가까이 붙어 있다.

 

 

 알고리즘이 있는데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요하겠는가?

 

 

 철학은 쉽지 않다. 철학은 멋지지 않고, 일시적이지 않다. 철학은 스파보다는 헬스장에 더 가깝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에 대해 가르친다. 

 

 

 철학은 다른 과목과는 다르다.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춥고 칙칙한 월요일 아침에는 지위와 특권이 아무 쓸모가 없다. 

 

 

 나는 제니퍼에게 말한다. “나는 충분히 성공하질 못했어.”

…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제니퍼가 말했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내가 말했다.

“그래,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보통 들은 질문을 그대로 다시 물어보면 사람들은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제니퍼는 아니었다. 내 질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졸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드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곧 나는 루소의 언어에 명확성 외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루소는 (어떻게 이 이야기를 예의 바르게 할 수 있을까?) 드라마퀸이다. 단어들이 어찌나 열정적인지, 페이지가 촉촉할 정도라고, 내 맹세할 수 있다. 루소는 주기적으로, 또 길고 상세하게 울부짖는다.

 

 

 대부분의 유럽 역사에서 사람들은 산맥을 야만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며 자원해서 산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인간은 바다에서 왔는데, ‘걷다walk’라는 단어의 어원에서도 그 사실이 드러난다. 11세기에 이 단어는 바다처럼 ‘굽이치고 요동치다’라는 뜻이었다. ‘걷다’라는 단어가 해안으로 걸어 나와 몸을 말리고 현대의 의미를 획득한 것은 13세기의 일이다. 

 

 

 나는 기차 복도에서 굽이치고 요동쳤다. 수하물에 곤두박질쳤다. 모르는 사람들 들이박았다. 

 “기차와 함께 춤을 춰야 해요.” 내 무능력을 지켜보던 한 나이 지긋한 여성분이 말했다.

 

 

 우리는 또 한 명의 훌륭한 산책자였던 윌리엄 워즈워스의 표현처럼 “우리에게 너무한” 세상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걷는다.

 

 

 무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라는 이성주의자는 “지식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소는 우리가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만큼만 특별해진다.

 

 

 본다는 것은 사진보다 언어에 더 가깝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저게 뭐지? 머그컵처럼 보이지 않아? 내가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본 다음에 알려줄게. 맞네. 머그컵이 맞아.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머그컵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 앞에 머그컵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한다. 머그컵은 그저 우리의 눈과 뇌에 전자기파를 보낼 뿐이다. 이 미가공 데이터로부터 우리는 정보를, 그다음엔 의미를(앞서 말한 경우엔 우리 앞에 있는 물체가 ‘머그컵’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창출해낸다. 

 

 

 소로는 이렇게 적었다. “관찰이 흥미로워지려면, 즉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

 아름다움을 개인적으로 판단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핏빛 노을. 수많은 별들이 수놓인 잉크처럼 새까만 밤하늘. 전부 개인적 의견이다. 철학자 로저 스크러튼이 말했듯, “그런 아름다움을 위한 공간이 있는 세상에 당신을 위한 공간도 있다.”

 

 

 소로는 말했다. “더 잘 보려면 손을 움직여야 한다.”

 

 

 모든 것에는 소리가 있다. 쥐 죽은 듯 고요해 보이는 방에서도 귀를 잘 기울이면 소리가 들린다. 오디오 엔지니어들은 그 소리를 ‘룸톤room tone’이라고 부른다. 

 

 

 소로처럼 천천히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은 가장 속도가 빠른 감각, 예를 들어 미각보다 훨씬 빠른 감각이다 ‘음미하다’와 비슷한 시각 관련 단어는 없다(어떤 대상에 시선이 ‘머무른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 표현에는 ‘음미한다’같은 감각적인 느낌은 없다).

 

 

 차가 꽉 막히면 우리는 “차가 왜 이렇게 막히냐”고 불평을 해대면서 나 또한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 나 또한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는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다. <베다>에서 말하듯,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좋은 철학자는 좋은 청자다. 지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이들은 얼마나 낯설든 간에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 

 

 

 바이오 아이오닉 파워라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내 아내의 헤어드라이어, 그 작고 사악한 악마 새끼는 하루 온종일을 방해힌다. 

 

 

 병약한 아테네 시민을 관찰한 에피쿠로스는 단순한 진단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죽어가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고통에는 본질적으로 끝이 있다. 그 고통은 평생 지속 되지 않는다. 고통이 가라앉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두려워할 것은 없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며,

 

 

 에피쿠로스는 어느 시점이 지나면 쾌락은 더 증가할 수 없으며 그저 다양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산 신발 한 켤레와 스마트워치는 더 많은 쾌락이 아닌 더 다양한 쾌락을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는다.

 

 

 6개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6개월은 인심 기간의 절반 이상이다. 6개월은 짧은 결혼이나 긴 외도일 수 있다. 6개월은 인생에서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오로지 줄 서는 데 쓰는 시간이다. 줄 서서 기다리는 것 말고도 우리는 주전자 물이 끓기를, 의사가 나를 만나주기를, 웹사이트가 다 뜨기를, 상담원이 전화를 받기를, 커피가 다 내려지기를, 아기가 잠들기를, 교통체증이 풀리기를,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기를, 한 번도 집에 이렇게 늦게 돌아온 적이 없는 우리 딸이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기를, 팝콘이 부풀기를, 얼음이 얼기를,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예의는 사회의 윤활유이고, 친절은 사회의 초강력 접착제다.

 

 

 기원전 5세기였던 당시에는 친절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개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꽤나 대담한 상상이었다.

 

 

 이메일은 편리하지만 편리함은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편리함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 즉 ‘편리세’가 있으며, 잃어버린 친밀함과 박탈당한 아름다움이 바로 그 비용이다.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우리는 기꺼이 편리세를 지불한다. 

 

 

 슬픔은 무척 무겁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그건 환상이다. 어쩌면 슬픔은 우리 생각보다 가벼울 수 있다. 어쩌면 꼭 용감무쌍한 행동이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삶에서 흔히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작은 것들의 위대한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할 수도 있다.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니체가 말했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는 것은 안다. 떡갈밤나무와 만개한 층층나무가 C&O 운하를 따라 늘어서 있고, 그 위로 풍성하고 새파란 하늘이 떠 있다. 하지만 나는 경치를 즐기지 못한다. 조바심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 스토아 캠프가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인 상사나 변덕스러운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어 같은 타인의 손에.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이런 고난을 스스로 부여한 속박에 빗댄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고전 연구자 A. 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노년은 고정되어 있는 거대한 물체이며,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다. 노년과의 만남은 절대로 부드럽게 이뤄질 수 없다.

 

 

 보부아르의 오래된 파트너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노년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절대로 온전히 내면화할 수 없는 상태, 오직 다른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늙어 보이고, 늙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누가 봐도 늙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자신이 늙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노화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돈 쓰는 데 신중한 청년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그러려면 철학 용어가 있어야 해. 진정한 철학자들은 다 자기만의 철학 용어가 있거든. 어디 보자. ‘끝내줌성’은 어때?”

 “그게 무슨 뜻인데?”

 “음, 끝내주는 상태를 말하는 거야. 모두들 약간의 끝내주는 면은 있다는 개념이지”

 

 

 부조리주의자들은 보부아르가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노년은 삶의 패러디가 아니다. 삶 자체가 삶의 패러디다. 노년은 특히 강력한 한 방일 뿐이다.

 

 

 몽테뉴에게는 자신의 우연한 철학을 담을 문학 형식이 필요했다. 그런 문학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몽테뉴는 직접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 에세이다. 프랑스어로 에세이assay는 ‘해보다’라는 뜻이다. 에세이는 실험이자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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