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우린 죽고 이딴 거 다 의미 없겠지만, 사치 코울, 문학과지성사, 2021(제1판 제1쇄)

 

 

 그러나 이 드라마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결코 곤경에 빠진 적이 없다. 엄마와 함께라면 나쁜 일이 일어날 리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엄마들은 아이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도 막을 수 있다. 엄마들은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줄 수 있다. 엄마란 존재는 자녀 스스로 자기 몸을 키워내기 전까지 아이들의 피이자 뼈다.

 

 

 나는 살면서 용감할 필요가 없었다. 용감함은 부모님이나 외국어로 자기 몸에 문신을 새기는 사람, 덜 익어 피가 비치는 닭고기를 겁 없이 먹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니까.

 

 

 엄마는 노력 중이다. 자기 두려움을 잠시 묶어두려 노력하고 있다. 미지의 짐승들로 가득한 세상을 두려워하면 더욱 외로워진다. 가끔은 그냥 비행기에 올라탈 필요가 있다. 그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외국 어린이가 손수 만든 크롭셔츠가 우리를 치유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분 전환, 자기애, 자아 개조, 정신 승리를 위해 쇼핑 사냥감을 물색하는 우리가 느끼는 내적 불안감에 대해서는, 애초에 걱정조차 하지 말자. 어차피 그건, 우리와 평생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백인’음식을 항상 싸주었다. 

 

 

 “너 왜 우리랑 앉아 있니?”

 “넌 피부가 갈색이잖아.”

 오우, 나는 생각했다. 이게 바로 그거구나. 누군가 말해주진 않았지만 느껴지던 바로 그 차이. 어떤 여자애들이 나와 친구가 되길 원하지 않던 이유가,

 

 

 고등학생이 되자 나는 계속 ‘깜둥이’라고 불렸다. 원래 인종차별이라는 게 사실대로 정확할 필요 없이 그저 가혹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건포도는 내가 이때까지 보통 적으로 여겨온 여자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귀여운 외모의 건포도와 친구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가 우리 반 아이였다면 ‘보통’애들이나 누릴 수 있는 ‘보통’의 삶을 매끄럽게 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혈통은 건포도 인생의 제목이라기보다는 각주이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난 8이나 10, 아니면 14 사이즈도 될 수 있었지만, 인도에서는 단지 XXL에 불과했다.

 

 

 건포도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나는 그저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코넛 오일을 바르면서 내 뼛속 깊은 속에 그녀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보통 트위터 유저들은 공공장소에서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기 뇌 속의 것을 트위터에 싸지르곤 한다. 별것도 아닌 분노나 수동 공격을 매우 날카롭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인데, 실세로 현실 세계에서도 그러면 아마 우리 모두 회사에서 잘릴지 모른다.

 

 

 너무나도 자주, 온라인에서 내게 소리 지르는 사람들은 자기 자아를 악플러가 되는 데서 찾는다. 내가 온라인 플랫폼에 시간을 쓰면 쓸수록 내 정체성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모양새가 되어갔다.

 

 

 좀더 나아지려 스스로 노력하기보다, 남을 욕하고 부숴버리는 게 더 쉬운 법이니까. 그건 그들에게도 힘이 있다는 믿음을 준다. 실제로는 영원히 느끼지 못할 힘. 욕함으로써 자기 가치를 세상에 말하고 싶은 거다. 혹은 그들이 먹어야 할 약을 챙겨 먹지 않았을 수도 있고.

 

 

 우리가 파티 그 자체였다. 

 

 

 우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재미있는 버전의 우리여야 했다.

 

 

 세상에 어떤 아빠가 딸과 전화하다 끊으면서 실존주의적인 절망감을 남긴단 말인가! 우리 아빠가 그렇다. 아빠는 대부분 누군가를 협박하는 것처럼 전화를 끊는다. “아무튼, 난 여기 있을 거야. 이 깊은 수렁에 빠진 채로 말이지.” 내가 좋은 소식을 알려줘도 “재능 있는 것들이 모든 걸 다 해먹을 거고 나머지 것들은 평범함의 바다에서 굶어 죽겠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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