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문을 열다, 이창준, 플랜비디자인, 2021(초판 2쇄)

 

 

 영어 ‘Lead’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흥미롭게도 거기에는 ‘누군가를 이끈다’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의 인도유럽어인 ‘Leith’에서 온 것입니다. Leith는 ‘문지방을 넘는다(to step across the threshold)’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익숙하고 안전한 세계를 떠나 낯설고 불안한 세계로의 여정, 그것이 ‘lead’한다는 말의 숨겨진 뜻입니다.

 

 

 리더십은 기술(technique)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표본이 되는 삶(life) 자체입니다.

 

 

 윗사람의 요구를 따라야 하고, 동시에 아랫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으며, 다른 동료들과의 신경전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하면 무심코 ‘정치적 패러다임(political paradigm)’에 빠지고 맙니다. 자기 능력을 부풀리고, 불만을 숨기며, 타인을 의식하는 행동을 시작합니다.

 

 

 구성원들은 겸허히 자기 모순을 들추는 리더를 신뢰합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이 창조적 긴장감을 견딜 수 없어 목적지의 수준을 낮추거나(“인생 뭐 있어?”),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을 피합니다.(“내가 뭐가 문제야?”) 또 언젠가 밖에서 보상이 주어져야만 그때 비로소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미숙아이길 자처하는 꼴입니다.

 

 

 구성원들은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의도와 목적이 나의 사사로운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구성원들은 내 맘을 구매할 이유가 없습니다.

 

 

 타인을 향한 존중, 배려, 관심, 애정, 자비는 왜 그리도 거북하고 힘든 노동의 일부가 되었을까요? 왜 우리는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 ‘왜 내가 그들을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일까요? 사랑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 중의 하나는 사람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판단하면 그 순간 우리의 뇌는 상대와 나를 분리하고, 상대를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게 합니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내적 힘이 사라지면 직장은 하나의 감옥이 됩니다. 일은 고역이 되고 주말, 휴가, 휴일만이 희망이 됩니다.

 

 

 모든 이야기는 잡설을 빼고 나면 결국 두 개의 이야기만이 남습니다. 하나는 ‘뻔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채찍과 당근이라는 은유는 말을 다루는 기술, 즉 ‘manage’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Manage는 ‘말을 길들이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마네기아레(maneggiare)’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니징한다는 것은 말(동물)을 다룬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철학자 캇시러(Ernst Cassirer)는 ‘인간은 물리적 우주에 살고 있지 않고, 상징적 우주에 살고 있다’고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이며, 일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빈약한 동기의 문제에 허덕이는 이유는, 바로 이 의미감을 주는 서사의 부재, 신화의 부재에 있습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쿠스 윤리학>에서 삶의 진정한 행복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감각적 재미가 아니라 자기 재능이 최고로 발현되어 탁월함을 이룬 상태를 뜻합니다.

 

 

 인게이지먼트에 관한 한국인을 대상의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의 직장인들 중 직장에 깊이 몰입하고 있는 사람은 7%밖에 되지 않았습니다.(글로벌 평균 15%), 그리고 직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자그마치 26%였습니다.(글로벌 평균 18%) 또 2010년에 ‘열심히 일한다면 더 나아질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73%인데 반해, 2018년에는 불과 47%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한국의 직장인들은 ‘직장 안에서 자기의견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습니다.

 

 

 성과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 – Kruger effect)’라고 불리는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더닝과 크루거는 자신들의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무능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무능할 뿐 아니라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이중고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이 괜찮은 큰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은 그런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를 심리학에서는 근원적 귀인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말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니, 가르치려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각자 자신의 삶을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견주어 보고, 공감과 이해를 구할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교정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시키려는 모든 행위는 명백한 폭력입니다.

 

 

 우리가 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의지의 부족이나 게으름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의 목표에 자신이 내적으로 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경쟁몰입(competing commitment)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변화를 열망하는 것만큼이나 속에서는 변화에 저항하는 두 개의 힘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다수의 기업들이 행동주의적 접근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리더십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 아니라 리더십을 하나의 지식과 슬로 바라보면서 훈련을 통해 바로 배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으로 빠르게 결과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결국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자르고 맙니다.

 

 

 이론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대화의 목적은 ‘사물을 분석하는 것도, 논의에서 이기는 것도, 의견을 교환하는 것도 아니라, 단지 의견을 앞에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일찍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하는 오늘날을 ‘액체근대’라고 불렀습니다. 

 

 

 도태의 불안은 계속해서 자신이 유능한 사람임을 입증해야 합니다. 빨리 빨리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모험적인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낙오, 도태, 무능의 위협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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