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 돌베개, 2020(초판 9쇄)

 

 

 

 예를 들어 집을 사는 것과 파트너를 선택하는 문제에서 우리가 이성과 감성을 활용하는 정도는 각기 다르다. 뜻밖에도 우리가 부동산 시장에서 더욱 ‘감정적’이며, 결혼시장에서 훨씬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바로 그런 문화가 우리의 이해와 결정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성격’이란 곧 욕구와 도덕규범을 일치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로써 성격은 집단의 가치가 표면으로 드러나 대상화한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성격은 자아의 존재론적 본질을 정의하는 데 기초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수행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격은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하고 칭송할 수 있을 정도로 의무감을 실천하는 행위가 되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성격은 개인의 내면이라기보다는 공공가치와 규범이라는 공공의 세계와 자아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능력이다.

 

 

 연애는 “수많은 속임수와 겉만 화려한 사기 그리고 온갖 감언이설로 얼룩진 게임이다. 그러나 이런 사기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낼 수 있을지 확인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학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은 규칙을 일종의 제한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학자에게 규칙은 사람들을 관계 맺어주고 함께 기대를 다듬으면서 아는 사람은 물론이고 모르는 사람들까지 서로 깊이 알아가도록 돕는 매체라는 점에서 제한이 아니라 허용과 가능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예의와 의식, 곧 사람들이 서로 숙지하며 그 도움으로 관계를 맺거나 끝내는 규칙의 다발은 가능성의 정글을 헤쳐나가는 데 유용한 잘 그려진 약도와 같다.

 

 

 의심의 여지 없이 에로스 자본이 가장 확실한 성과와 강점을 자랑하는 영역은 배우자 선택이다. 캐서린 헤이킴이 논증하듯, 고등학교에서 특히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소녀들은 결혼할 확률, 그것도 젊어서 결혼할 확률이 매우 높게 나타났으며, 더욱 놀랍게도 훨씬 높은 경제 수준을 자랑했다(결혼 초기와 15년 뒤를 나란히 비교한 결과다).

 

 

 21세기에 여성의 에로스 자본은 여성에게 경제자본의 일부가 되었다.

 

 

 선택과 결합을 이루는 감정의 작용방식을 분명히 살피자면 우리는 결혼을 기피하는 ‘남성의 망설임과 여성의 결혼 기대감’을 두 개의 대칭적 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

 

 

 혼전동거를 하는 비율이 급격히 상승하기는 했지만, 이런 관계의 40퍼센트는 5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들 대부분은 2년 남짓 함께 산다. 55퍼센트가 실제 결혼에 이르기는 했지만, 평범하게 결혼한 부부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이혼했다. 남자든 여자든 동거를 하는 동기는 결혼이나 어떤 장기적 결합의 결정을 내리려는 기대감이다. 그러나 서로 생각을 해가며 결혼 결정의 근거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결합을 저해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을 속인 사람을 도덕적으로 전혀 심판하지 않았을 분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터넷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충고를 구하기까지 한다. 그녀 자신이 이 사건을 도덕적으로 어떻게 가늠해야 좋을지 전혀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런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태도는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이용자들에게 충고를 얻으려는 자신감 상실에서 정점을 찍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최소한의 신화와 환상과 거짓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니까 현대는 자유롭게 풀어주었더니 갈팡질팡 헤매다가 다시 주인을 그리워하는 노예의 애잔한 특징을 가진다. 이 애매함에 가장 적확한 사회학 개념을 부여한 사람은 주지하듯 막스 베버다. 그는 현대성의 특징을 ‘탈마법화’의 힘으로 규정한다.

 

 

 애정관계 전반에 파고든 정신건강이라는 이 모델은 사랑을 기분 좋은 행복에 맞춰 정의하며, 아픔은 깨끗이 잊으라고 강권하면서, 개개인에게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 극대화하라고 부추겼다. 이 모델은 자기 이해라는 개념을 성숙한 자아의 중심에 세웠다. 무엇이 자신의 이득이지 알아내고 방어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감정과 갈수록 똑같이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사랑은 자기이해라는 개념과 현실에 계속해서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을 잘한다는 건 자기이해에 맞게 사랑한다는 걸 뜻했다. 

 

 

 그럼에도 감정은 등가성 원리의 측정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감정활용성’과 ‘감정작업’ emotional exrpessiveness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감정활용성’과 ‘감정작업’, 심지어

‘감정투자’라는 것은 누가 관계를 생생하게 유지하도록 더 많은 노력을 투자하는지, 양쪽의 감정 필요성이 적절히 표현되고 소화되도록 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발상이다.

 

 

 만약 제가 남자에게 왜 꽃다발을 선물하지 않느냐고 묻거나, 왜 당신은 나에게 연애시를 써주지 않지 하고 불평한다면, 저는 페미니스트로서 제 정체성을 스스로 배신하는 느낌일 거예요. 그래서 그런 요구를 할 수가 없어요. 저처럼 오늘날의 해방된 여성이라면 그런 허튼 게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부탁은 하지 말아야죠. 하지만 현실의 저는 그런 부탁을 할 권리가 있다고 믿어요.

 

 

바버라 : 좋은 남자를 찾기란 정말 어려워요. 최소한 저한테 맞는 남자이기만 해도 좋겠어요. 좋은 남자를 찾으려면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 모양이야 하고 믿을 때가 많다니까요.

나 : 왜죠? 도대체 좋은 남자는 어떤 남자죠?

바버라 : 예를 들어 제 복잡한 심리를 알아주는 남자라야만 해요. 저는 가능한 모든 두려움에 시달리며, 있을 수 있는 모든 욕구를 가졌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저는 매우 독립적인 여자예요. 저만의 공간을 가져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꾸밀 수 있다는 느낌이 필요해요. 다른 한편 저는 귀여움을 받아야만 해요. 보호받고 있다는 감정이 아주 중요하죠. 이 두 가지를 모두 이해하는 누군가를 찾기가 정말 쉽지 않아요. 전 아주 강하고 주관이 뚜렷하며 저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남자가 필요해요.

 

 어느 모로 보나 바버라는 심리학적 존재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여성이다. 자신의 요구가 모순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자아인식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자아인식을 빚어낸 게 바로 심리학적 존재론이다. 자신의 감정을 고정해둔 채 배우자 후보를 평가할 명확한 인지수단으로 삼는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이러저러한 모델로 구축된 이미지를 따르도록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심리학이 떠받드는 밀도 높은 감정과 이상적 배우자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형식은 무수한 이미지와 스토리와 상품을 종합한다. 이를테면 러브스토리 하면 명품과 해외여행과 고급호텔을 미리 떠올리는 식이다. 

 

 

 문화현상의 하나인 상상력은 결과적으로 고도로 제도화했으며, 동시에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 되었다. 실제 대상이 없거나 적어도 어떤 유일한 대상에 집중하지 않는데도 상상력은 모나드 같은 개인들이 자아도취를 즐기는 수단이 된 것이다.

 

 

 남성을 두고 감정적으로 무능하다고 못 받는 대신, 우리는 감정을 소중히 하는 남성성이라는 모델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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