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세계관 없는 사람이 너무 싫었다.
보다 정확히는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무식한 세계관이 싫었다.
보다 적나라하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싫었다.
기껏 대학교 보내놨더니 대모나 한다고 얼굴 빨개져서 뉴스 보며 소리치는
초등학교 중퇴자 연탄배달부의 모습.
어떤 세계관들이 존재하는지를 알고 그 뒤에 내 세계관을 정하자 싶었다.
여기서 점프.
서른 즈음, 세련된 서울 강남 광고회사를 몇 년 다니다 보니
세계관에 얽매여 살아온 십대와 이십 대의 내가 답답해 보였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지 않은 채 책만 보고 아는 척하는 것 같았다.
사소한 것들에 연연하는 쿨하지 못한 모습이 찌질했다.
노래방에 가서 분위기 띄우는 노래 한 곡 못하면서, 간주점프가 노래에 대한 예의인가 아닌가를
혼자 사색(?)하고 정의하려는 스스로가 거슬렸다.
옳은 세계관에 대한 집착이 곧 에고이고, 어린시절 부정하던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이며,
말 안 통하는 부적응자 같다고 느꼈다.
가벼워지고 싶었고, 사회인이 되고 싶었고, 사회에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세계관을 놓아버리기로 하자 확실히 유연해진 것 같았고 행복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쓸데없이 혼자 침울할 필요 없었고 유행하는 옷 트렌드 외모 꾸미기에도 관심이 늘었다.
여기서 점프.
지금은 사소한 일에도 휘청휘청한다. 회사의 눈치를 본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뭐일지는 안다.
뼈대 없이 지은 집처럼 작은 바람에도 쉽사리 휘둘린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내 생각이 확고하다면 흔들릴 일도 없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믿음, 나만의 세계관이 없다는 게 유연한 건지 텅 빈 건지 모르겠다.
지하철 1호선 자르반 84세의 확고한 세계관이 왜 더 자유로운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