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닝
한국인 치고 하얀 편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인성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하얗다는 얘기를 종종 들어왔고 사실 삶의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다 보니 얼굴이나 팔다리는 그렇다 치고 배와 등은 사골처럼 뽀얬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를 희멀건함으로 살아오는 건 어쨌건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더 이상 운동과 다이어트가 나이를 막아 세우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는.
복근보다 지방이 많아진 배는 힘을 풀면 마치 보따리를 내려놓듯 철렁 뱃살을 내려놓았다. 20년째 계속 중인 다이어트와 운동에 다시 힘써보지만 예전처럼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여름 휴가 가서 수영복 입고 찍은 사진은 눈부실 정도로 처참했다. 무엇보다 억울한 건 똑같이 지방이 껴도 몸이 하얗면 더 흐물거려 보인다는 점이었다.
어느샌가부터 수영장에 가면 비슷한 또래 남자들의 몸을 훔쳐보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위안을 찾아보려 했으나 그조차도 잘 안 될 때가 많았다. 칼 같은 눈으로 비교해 보았을 때 분명 저 사람은 나와 비슷한 체형 비슷한 살에 비슷한 비계를 갖고 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냥 대충 볼 땐 살이 하얀 내가 더 배가 나와보였다.
그리하여 시작한 태닝.
10회 차를 끊고 7회 차를 오늘 다녀왔는데, 효과는 3회 차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변한 거라곤 색이 좀 더 짙어진 것 밖에 없음에도 거울 속 내 몸이 좀 덜 민망해 보였다. 운동을 더 많이 하고 음식을 더 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바로 징후가 왔다. ‘넌 몸이 아파질 거야 곧’ 징후. 어깨와 등이 뭉치고 눈이 빠질 것처럼 뜨거워지고 어지러움과 두통이 기어 다니고. 그 상태에서 계속 무리하면 바로 몸살이 터졌다.
몸살이 무슨 뜻일까 찾아보니 한자어가 아니라 우리말이었다. 몸이 몹시 피로하여 일어나는 병. 팔다리가 쑤시고 느른하며 기운이 없고 오한이 난다. 이를 굳이 한자어로 표현한다면 身殺 몸신에 죽일 살. 몸을 죽이다는 뜻.
살, 몸살, 뱃살, 튼살, 허벅살, 옆구리살… 평생을 함께 뒹굴며 살아온 단어 중 하나가 살. 이 살을 좀 덜 살처럼 보이기 위해 서양에서 들여온 단어 태닝. 묘하게 도시적이고 서구적이며 영화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이 태닝이 내 살을 탠tan 한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재배되는 알로에가 로션이 되어 집에 돌아온 살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