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의 바깥, 장철문, 문학동네, 2020(1판 3쇄)

 

 

 

 저건 뼈야 곰이었던 내 조상의 뼈

  • - 백화 중

 

 

 

 

편지

 

아우와 나는

무학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주고받는

편지였다

 

어머니가 들려보낸 수박을

외할머니는

툇마루 청굴레 그늘에서 갈랐다

 

수박을 앞에 둔 외할머니의

부엌칼은

슥-

봉투칼처럼 지나갔다

 

수박은 외할머니의 갑골이었다

칼이 지나는 소리와

그 빛깔의

청탁

 

갈라진 수박을 앞에 놓고 한번 물으셨다

- 에미가 한번 안 온다더냐?

- 할망구가 노망이 났등갑다

어머니의 말끝이 벼랑처럼 깊었다

 

그해 가을, 봉투가 누런 편지가 왔다

아버지가 안채에 들이지 않고

문간 고비에 꽂았다

 

집 안팎 두루 닦아내시고

공동 우물가에서

걸레 헹궈

꼬옥 비틀어 짜던 그 자세에서

 

숨을 거두셨다 했다

그 자세 그대로 기울어지셨다 했다

 

임종은

아영면 월산리 구지내기 쪽 노을이 했다

 

 

 

 

길다

 

아버지는 얼마나 자주 길다고 느끼실까?

빗길에 차를 몰아가며

길다고 느낀다

아침마다 병실에서 눈을 뜰 때

길다고 느끼실까?

신호에 멈춰 서서

와이퍼에 밀려 흘러내리는 빗물이

길다고 느낀다

아버지의 담배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앉아 있던 옥상의 시간처럼

신호가 길다

한나절 변기에 앉아서 아버지는

어떤 기분일까?

지금 여기서 내리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오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갓길에 차를 세우고,

기어를 P에 놓고,

사이드미러에 흐르는 빗물이 길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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