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장 슬픈 순간에 사랑을 생각한다, 새벽부터, 워터베어프레스, 2024(초판 1쇄)

 

 

 

 생각해 보면 쓸 수 없고 쓰지 못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결국은 쓸 수 있는 이야기만을 쓴다.

 

 

 아파트 경비원 일을 시작했다. 연금에 여생을 맡기고 유유자적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길고, 돈 많은 사람들도 열심히 돈을 벌고 있더라. 91세의 아버지는 오늘도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며 전기톱으로 고목을 벤다. 겨우 35년 근무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잠깐이지만 나태했었다.

 

 

 아파트 경비원의 3대 과제는 제설 작업, 제초와 전지 작업, 낙엽 쓸기인데 봄비가 그치면 세상 모든 풀과의 불화가 시작될 것이다.

 

 

 타인의 아픔은 확률이나 과학의 영역이지만 내 아픔은 운명이 된다. 살아가는 일이 힘에 부치고 삶이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반복되면 운명이 고개를 든다. 감기에 시달리는 아내를 뒤로하고 나선 새벽 출근길에서 운명이라는 서러운 단어를 떠올렸다. 새벽을 지나는 차량의 불빛이 서럽게 정겨웠다.

 

 

 비가 내리는 밤에 건물 주변을 순찰했다. 4월은 초록을 향하여 깊어지는데 무엇을 향하여 깊어질 수 없는 나는 불빛 아래서 한없이 젖어가는 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경비실은 세상의 바다에 떠 있는 낯선 섬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배가 뜨지 않는다. 그러면 섬은 정말 섬이 된다.

 

 

 내가 세상에 친절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삶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친구가 내 삶이 ‘간난신고’를 지나왔다고 말했다. 지금도 삶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저녁밥을 먹는데 아내가 그런다. 여행 가면 경치 구경보다 좋은 게 뭔지 알아. 구경이 끝나고 밥을 안 해도 된다는 거야. 그래서 여자들은 해외여행을 좋아해. 기간이 길수록 더 좋아. 아무 말 못하고 밥을 먹었다.

 

 

 부부는 생각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걱정이 같은 사람이다. 오늘 맞이해야 하는 일들이 마음을 누른다.

 

 

 남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내의 빛나던 시절에 나는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냈다. 그것이 내 삶에서 가장 안타깝고 후회스럽다.

 

 

 나는 한 번도 성공한 기억이 없는 사람이다. 선택의 여지 없는 삶을 받아들이며 견디고 살았다. 60대의 정신적인 안정도 여유도 없다. 내가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내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다. 그래도 사람 노릇하며 살았다고.

 

 

 아는 사람의 삶이 궁금하지 않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 편하다.

 

 

 시련이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강하게 단련시킨다는 미신을 믿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실상은 절망에 익숙해지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긴다.

 

 

 아침 6시 30분에 친구가 전화를 했다. 매일 전화를 주고받는 유일한 친구다. 오전 오후에 교대로 전화를 하기도 한다. 먼저 날씨를 묻고 시작한다. 먹고 사는데 걱정 없는 친구도, 세파에 흔들리는 나도 외로운 것이다. 가끔은 술을 마시고 밤에 전화를 해도 기꺼이 받는다. 외로움을 받는 것이다.

 

 

 어쩌다 찾아온 기쁨은 머물지 않았고 슬픔이 옷처럼 나를 감싼다. 가을을 말하면 내가 속한 계절이구나 느낀다.

 

 

 풍요로운 삶을 살던 지인이 60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운동을 열심히 했고 술, 담배도 멀리했는데 오래 사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한 것이다. 슬픔도 살아 있는 사람이 받는 선물이다.

 

 

 마라톤을 하거나 지리산을 오를 때도 나는 혼자서 새벽의 길과 산에 있었다.

 

 

 아내와 나는 사위가 술과 담배를 안 하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다행히 뜻대로 되었다. 술이 나쁜 게 아니라 술을 마신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술을 끊고 10년을 보내며 내가 술자리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깨달았다. 술 마시는 남편을 기다리는 삶이 딸에게 없어 다행이다.

 

 

 아침에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할아버지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결국은 아들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혼자서 잘 노는 사람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스스로와 더 친하다. 아내가 그래도 명절이니 장보러 가자고 한다.

 

 

 2월은 봄을 기다리는 달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봄이 담겨있는 달이다.

 

 

 여기까지 읽어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이 걱정된다. 

 어떤 글은 짧지만 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도 있다.

 헤아려 읽어주셨다면 더 이상의 고마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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