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내가 알던 한 여자가 떠오른다.

사실 안다고 할 정도로 친한 여자는 아니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이 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자기 친구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눈이 빨개져서 들어왔다.

둘이서 손 잡고 한 참을 울다 들어왔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즉, 이들의 가장 친한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울었다고 하는데

그 빨개진 얼굴에 교묘하게

득의만만한 쾌락이 엿보였다.

 

그들은, 친구의 슬픔에 감정이입을 하고 그 슬픔에 취할 뿐더러

자신들은 이렇게 친구의 슬픔마저 내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맑은 심성을 지녔다고 자랑하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어처구니 없었던 것은,

이 여자들은 드라마를 보다가도 이렇게 운다는 것이다.

절대로 울지 않다가 어느 순간 눈물을 뽑아낸다면

이들의 통증이 눈물 없이는 못견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드라마에서 누가 죽어도 울고

실제로 친구의 어머니가 죽어도 운다.

이 두 울음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난 모르겠다.

 

이런 울음은 조건반사적 울음이라고 생각한다.

헐리우드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기승전결의 분명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관객들은 이미 헐리우드식 구조에 반응하는 학습상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헐리우드 영화는 정확히 예정된 어느 지점에서 흥분상태를 조장하고

오케스트라를 동원해서 음향효과를 강렬히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조건들, 음향, 반전, 위기상황, 절정 등에 반응해서

그 부분에서 사람들은 울도록 조건화된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스토리를 똑같은 배우를 통해 영화화하되

장 뤽 고다르 감독이 만든다면 별로 울 사람이 없다.

수준 높은 프랑스 영화를 보고 울기란 무척 어렵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도통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하고 어느 부분에서 울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깐느 영화들은 재미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일부 (정말 지극히 일부)의 방식으로만 반응하는 감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감성은 주입교육과 텔레비젼 드라마 쇼프로그램으로 양성된다.

 

다시 이 여자로 돌아가보자.

몇 번을 다시 관찰해봐도 이 슬픔은 조건화된 슬픔이 분명하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전보! 가 도달하면

이 여자의 슬픔은 눈물로 변화되어 표출된다.

 

이 슬픔에 진실은 별로 없다.

이 여자는 아마도, 자신의 친구가 처한 상황을 울어야 할 상황으로 인식한 것 같다.

자신의 친구가 지금 슬픔에 휩싸여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이 이 친구의 입장이 된 것처럼 상상했을 것이다.

뿐더러, 자신은 이 슬픔에 싸인 친구된 입장으로써 마땅히 울어야 하는 입장이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다른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울것 같니?라고 물었을 때

이 여자는 울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로서는,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셨더라도 나는 절대 안울어, 라고 대답한 사람이

대답과는 달리 참지 못하고 울어버리는 울음을 선호한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영국의 동화가 있다.

서문에 소설가 김영하씨가 이 동화를 추천하는 글이 있다.

자신은 아이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이 동화 속의 아이는 좋아한다.

나는 잘 우는 아이들을 싫어하는데, 이 동화 속의 아이는 울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아키라는 울지 않는다.

<AI>의 꼬마 로봇도 울지 않는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의 그녀석도 울지 않는다.

<거북이도 난다>의 위성 역시 지뢰를 캐서 팔아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잘 울지 않는다.

 

현실과 영화는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장정일의 책을 읽지 않고서 장정일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과 같은 시스템의 사람이다.

<AI>를 제외하고 위의 영화들은 현실만큼 지루하다.

 

다큐멘터리로 넘어가자. 소녀가장, 소년가장, 입양아, 어린 장애인, 백혈병 어린이, 흔하디 흔한 모습이다.

잘 울지 않는다.

 

다시 위의 여자로 넘어가자.

위의 여자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자동차에 치여 죽은 짐승의 시체를 보면 눈을 감는다.

얼굴을 가져다대면 토할지언정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

 

날아가던 어미새가 포수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더라도 눈물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나는 훈련을 시키던 어미새가 한 달 만에 힘들게 아이들을 데리고 상처와 배고픔 속에서 마침내 날아올랐습니다. 그때 술에 취한 날라리들이 그물을 던져 새들을 잡으려했습니다. 어미새는 어떻게든지 아이새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물을 물고 있는 힘껏 날아올랐습니다. 그 때문에 입이 찢어지고 날개가 찢어졌습니다. 아기 새들은 울면서 살아남았으나 어미새는 날라리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날라리들은 아기새들을 놓친 것이 분해서 어미새를 잔인하게 돌로 내려쳤습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들어가면 눈물 흘릴 것이다.

 

이것이 조건반사적 울음이다.

이런 이야기를 간접체험하게되면 우는 것이다.

그래서 어처구니 없게도

다큐멘터리로 나래이션과 함께 <시크릿 가든>이나 <S.E.N.S> 등의

뉴에이지 선율이 깔리는 순간에 방에 누워 텔레비젼으로 죽는 짐승을 볼 경우

직접 산에 가서 죽는 짐승을 볼 경우보다 더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산에는 오케스트라 BGM이나

보아야 할 장면을 알아서 선택해주는 카메라감독이나

울어야 할 부분에 친절하게 음악을 넣어주는 PD나

그에 공감해주는 게스트들이 없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슬퍼야 하는 분위기나 슬퍼야 하는 상황 슬퍼야 하는 시점에

자동 반응 해서 자연스럽게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볼 수있는데

나로서는 그들이

 

괴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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