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징조들>

테리 프래쳇. 닐 게임번 지음, 이수현 옮김,GRYPHON BOOKS,2003,

 

이 책의 원제는 이렇다. <GOOD OMENS>

 

이 책 표지의 메인 카피는 이렇다.  "천국 가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묵시록"

 

이 책 평가 중 두 개는 이렇다.

 1. "괘씸하게 웃기다가 돌연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는, 판타지와 코미디가 뒤섞여 자유로이 달려나간다. 절대 추천!" - 라이브러리 저널

 2.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직계 후손" - 뉴욕 타임즈

 

 

여기서 잠깐, 내가 읽은 번역본의 제목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였는데, 여기 평가를 번역한 것에는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고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조만간 알아 보려고 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각종 풍자유머들로 가득하다. 다만, 그 내용이 영국사회와 시사성, 영국적 문화가 강해서 나는 별로 재밌게 웃지 못했다. 1권만 봤다.

 

<멋진 징조들>은 그 후에 나온 책이지만 보다 고전적인 느낌이 강하고, 여기서도 온통 풍자유머들이 넘치지만 그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문화를 충분히 접한 뒤에라야 가능 할 것 같다.

 

 

 

이런 대화가 나오는데 꽤 고전적이어서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 어떻게 하지?"

"가서 좀 자야겠어."

"자넨 잘 필요가 없잖아. 나도 잘 필요가 없고, 악은 결코 잠드는 법이 없으며, 선은 언제나 불침번을 서는 법."

 

 

이 책에 나오는 악마와 천사의 대화이다.

이 악마는 은근히 마음이 약한 악마이며

이 천사는 은근히 요령이 좋은 천사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세상을 좋아해서

음악과 극장이 없는 한없이 지루한 천국과 역시 음악과 극장이 없는 지옥을 모두 기피한다.

 

악의 정부에서 시행하며 큰 범주에서 하나님의 상부에서 눈감아주는 아마겟돈을 앞두고서

이 천사와 악마는 인류 멸망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각자 지옥과 천국정부의 눈치를 보며 동분서주한다.

 

내가 삶에 지치는 경우 중 많은 경우에

배운 것과 현실이 너무 다르고, 또 이상이나 이념적인 것과 현실이 너무 다르고,

모든 것의 기준점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나쁜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선과 악이 있는가 하면, 어디부터가 선이고 어디부터가 악인지 모르겠고,

사실 현대사회에서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을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대단한 모험이 된다.

 

이렇게 고전적인 뉘앙스의 판타지 코미디는

천사와 악마가 분명하게 등장해서 안도감을 느끼게 해준다.

적어도 픽션이기는 하지만, 이 세계에는 어느 정도 진실과 거짓이 양분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양분되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언제나

진실 속에 거짓이 있거나 거짓 안에 진실이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직까지도 현실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있는 셈이지만,

이런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상을 받고 인기를 얻고 영화화 되는 걸 보면,

나만 현실에 어리둥절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게 수호천사가 있고, 또 내게 수호악마가 있고

이것이 단지 비유가 아니라 실제라면 꽤 재밌을 것도 같고 무서울 것도 같다.

587페이지 짜리 책인데, 아직 200페이지도 못읽었다.

고전적인 뉘앙스의 이 소설은 페이지가 썩 빨리 넘어가지는 않는다.

 

....

 

지금 막 읽은 200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은 이렇다.

 

10살짜리 동네 꼬마들이 자기네 아지트에서 새로운 놀이를 공모하고 실행하는데

마녀사냥 놀이이다.

그래서 멤머 중 한 명이 자기 여동생을 데려와서 묶는데 6살짜리이다.

대장이 너는 마녀냐? 하고 묻자 여동생이 그렇다고 해서 난처해한다.

왜냐하면 처음에 아니라고 해야, 실토하도록 고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마굿간 세트를 주고서 마녀이되 마녀가 아니라고 말하도록 시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책의 그림을 흉내내서 물의자고문 등등을 한다.

원래 계획은 불을 붙여 태우는 것이었는데 혼날까봐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

 

이런 풍자 역시 코미디이면서 꽤 고전적인 내용과 방식을 따르고 있다.

"비극이란 몰입을 유도하고, 희극이란 냉정한 시선을 유도한다."

"비극은 한바탕 울게 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지만, 희극에서는 그런 몰입하는 카타르시스는 없다. 희극의 발달은 부패한 현실을 풍자하는데서 시작되고 진행되어 왔다."

 

마녀사냥이라는 고전적 풍자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당분간 수 십년, 수 백년이고 갈 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회의 힘이 약해지고 표현의 자유가 많아질수록 여태 시도하지 못했던,

국가정부에 대한 풍자, 종교세력에 대한 풍자는 더욱 심한 수위로 드러나게 된다.

 

벌써 수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녀사냥이 코미디 텍스트로 사용되는 이유는

그것이 충분히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크리스마스 주간에 공연되는 지겹도록 뻔한 레퍼토리는 이제

마녀사냥과 고문, 십자군, 교회세력간 권력 투쟁으로 다양성을 갖춰가리라 전망한다.

움메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그외의 주요 유럽작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심으로 사과를 촉구하는 리얼리즘 소설을 지향해왔다.

 

사과하는게 그렇게 힘든가.

 

마녀에게도 인격이 있고,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었을 것 아닌가.

누가 죽고, 누가 불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나와 먼 시간, 먼 지역의 일이었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얼간이가 되어버리는 기분이다.

 

정부, 공무원, 지도자들, 신귀족들, 종교세력...

이들은 권위를 좀 낮추고 솔직하게 미안해하는 맘씨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분명 현실에서도 권력과 독단으로

억울하게 집단에 눌려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내가 이들을 내 시나 글에 담는다면 메타포 1순위는 당연히 마녀사냥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의 개똥녀 사건을 두고, 마녀사냥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또, 그런 식으로 전체 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이 필요 이상의 고통을 당할 경우

마녀사냥이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다.

 

마녀를 주인공으로 해서 <인간사냥>이라는 연극 공연을 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

 

마귀소굴에 빠진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모든 동화들의 메타포가 사실,

진짜 마귀가 아니라 인간소굴이라는 것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아닌가.

 

도깨비나라에 붙들려간 선량한 백성이 등장하는 한국전래동화들에서

도깨비나라란 권력과 횡포의 양반나라, 즉, 당대현실이라는 건 보편적인 시선이 아닌가.

 

아무튼 마녀사냥은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겪은 모든 감성체험 중에 가장 구역질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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