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빵점이라는 거죠' - 피데이
내가 푼 간호학과 시험의 결과를 공정하게 알려줘서 감사해요.
살면서 빵점 맞기 처음인 것 같아요.
그런데
몹시 통쾌하네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마칠 때까지를 돌이켜보면
그리 공부에 매달리는 녀석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 시험 때만 되면 불안 조급해하고 한 문제라도 더 맞추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 때
빵점을 맞았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나락으로 떨어졌으리라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때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선생님과 매와 용돈과 체벌과 눈치 때문에
시험이 끝난 뒤,
통쾌하다! 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때는 정말, 시험이 제법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의 기억을 지닌 채로, 그대로 다시
초등학교부터 다시 다니게 된다면,
학교는 꽤 재밌는 곳이 될 것 같아요.
아주 엉망을 만들어 버릴 수 있을텐데.
까페에서도 했던 말인데,
고등학교 문학시험 주관식 문제
민족 2대 저항 시인을 쓰시오.
(이육사), (윤동주) 라고 써야 정답처리 된다는 걸 알았고,
실제로는 윤동주가 저항시인으로 분류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즉, 쓰레기같은 교육부에서 만든 쓰레기 같은 문제였는데
(이육사), (윤동주가 아니야, Fuck you!) 라고 쓰지 못하고
그냥 그들이 바라는 틀린 답을 적고서 얻은 결과라고는
당시의 총점 3점 추가.
그리고 10년 동안의 죄책감.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점수 3점 때문에 포기한 거죠.
이를테면 크리스챤이 떡 한 조각이 먹고 싶어서, 배교하는 것과 같죠.
기독교 재단에 의해 운영되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한 남자 고등학생이 1인 시위 하는 것을 보고서 얼마나 충격과 죄책감을
경험했는지 몰라요.
이 녀석은 같은 고등학생이지만, 당시의 나와는 너무나 다르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몇 가지의 편리와 맞바꾸고 말다니.
사실, 누구나 하는 경험(타협)이지만,
하필이면 10대에 그랬다는 것이 가슴 아프네요.
앞으로도, 몇 번이고,
규정된 시간이 지나 승마장을 찾아온 손님을 옆에 택시조합원을 데려 왔다는 이유로
풀러놓은 재갈을 다시 말에 물려 일을 시켜야 했던 대학 1학년의 서글픔처럼,
정해놓은 규칙이 여러가지 힘과 억지에 의해서 무너지는 걸 봐야 할때마다,
내가 스스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마다,
그 시험문제가 떠오르고 말 거예요.
그런 문제를 그렇게 풀라고 가르친 교사도 못말릴 사람이고,
지독하게 타협적인 교육청의 개였고,
분명 전교조원이 아니었을 테고,
교감의 듬직한 부하직원이었겠지.
교사는 어디가고 직장인들만 남아있는 학교에서
설마, 아직까지도
민족 2대 저항시인을 이육사, 윤동주라고 배우고 있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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