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비를 맞고 돌아다니다가 제일기획 이선구 선배가 번개 문자를 날려서
또, 종로에 있는 <달의 뒷편>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몹시
그르렁거리는 심정이었기 때문에 술 마시고 실수 할까봐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기분에 그런 걱정할 틈이 있다니 별 것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그건
예상 외의 모임이 되고 말았는데, 10년 가량 된 천리안 광고 동아리 사람들이
선구 선배 번개에 8명 정도가 나왔던 것이다.
약간
어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선구 선배 말하길, 이 중에 어색한 자리와 사람 많은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자리도 있는 법이다,라고
미친
헛소리를 하는 걸 참으며 동동주를 마시고 김치전, 해물파전, 부대찌게, 도토리묵,
그리고 미지의 안주 하나가 기억나지 않는다.
문득
여기 테이블 아래 "달의궁전 다녀감"이라고 새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기력한데다가 주변이 어수선해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더구나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행복한 밥상 출연' 현수막에다가 각종 신문 주말판에 소개된 기사들이 벽에 붙어 있어서
이게
달의 뒷편이긴, 앞편이지, 그런 생각을 했다. 명함을 받았는데 평균연령 37세 정도의
전문직 종사자들인지라 다들 팀장, 이사, 대표, 그런 직함들을 지니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은 카피라이터 였고, 마흔 살 포토 그래퍼 한 명과 37세 디자이너 한 명이 섞여
있었다. 선구선배는 제일기획 국장이다. 무슨 국에 있는 장인지는 모르겠다.
택도
없이 진지해져서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선배는 내게 말했다. "왜그래",
졸업 후 5개월이나 번듯한 직장 없이, 흐느적 대는 내 모습이 못마땅했나보다.
근데
...
오늘
어제 받은 명함과 친구들 명함과 여태까지의 버릴 것 버리고 남은 명함을 모아서
스캐너 위에 모두 깔았는데 스캐너 면적이 부족했다.
어제
취직할 마음 생기면 연락해라, 취직자리 구해준다, 유치하게 제일기획이나 금강기획에
들어가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
이죠.
연줄
로 들어오거나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들 틈에 너가 끼여있느니 열정 많고 배울 것 많은
곳에 들어가는 게 보다 좋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셨는데 본인이나 나나 제대로 듣고 얘기하고 옮겨 쓰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명함,
이것이 내 지갑을 불룩하게 하고 별 쓸 데도 없는 카드들과 까페나 스파게티 식당
쿠폰들과 어울려 돈 없는 지갑을 그저 묵직하게만 한다.
한편
이게 다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이고 소중한 인생의 증표같기도 해서
버리지도 못하고 별로 쳐다볼 일도 없는 이 명함을 어떻게 처분하는 게 좋을지 난감하다.
내가
명함을 만든다면 분명, 모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냉면 한 그릇, 혹은 칵테일 한 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는 기능을 하도록 만들고 싶다.
혹은
미용실에서 파마를 할 수 있다거나, 파리 바게뜨에서 치즈케익을 하나 얻을 수 있다거나
또는 세탁소에 운동화 빨래를 맞길 수있다거나 그런
쿠폰
같은 명함, 상품권 같은 명함, 아니면 아예
엽서 정도 크기로 만들어서 김철수씨 판화나 <그녀님>의 그림 같은 걸 복제해서
액자에 끼워서 건네주고 싶다.
자정
이 되면, 어떤 술자리든지(TB와 있을 때만을 빼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건 내가
신데렐라여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TB는 나의 미녀왕자님이고
우연
같지만, 내가 일하던 곳에 TB가 함께 일한 시간은 겨우 한 달뿐이고, 그 이전까지의
그녀의 행로와 이후로의 행로를 짐작했을 때 이 한 달의 시간은
경력
으로 보아도, 인생 줄거리로 보아도, 그저 잠시의 아르바이트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으며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의 회사에 들어가서 거의 어긋나지 않는 길을 따라 삶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럼
왜 그녀는 여기서 고작 한 달을 머물렀는가, 그건 바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겠지. 그리고 내가 이곳에 졸업 한 이후로 취직걱정도 하지 않고 태만하게 6개월 가량 머물고 있었던 이유도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서겠지.
그럼
그만둬도 되는 때가 온 것 같다. 어머니를 방치하고 여행을 강행 하거나, 어머니를 감내하며
취직을 하거나.
문득
넥타이를 매고 밤샘을 하며 회사를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다.
어디 깨끗한 마을의 펜션 사장님이나 찾아가서 양자로 맞아들여달라고 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보다 나답다는
생각
이 시원하다.
내일
은 오랜만에 취재를 나가기로 했다. 춘천, 원주, 횡성, 인재 등지를 돌아다닐 것 같다. 정식 기자라면 취재지에 도착하면 어수선하게 설명하기 보다 명함 한 장 척-하니 건네겠지만.
저는
어디어디서 왔고 이런이런 의도로 사진을 좀 찍겠습니다,라고 굳이 힘겹게 설명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겨우
나쁘지는 않은 정도로까지 기분이 회복되었다. 오늘밤 홀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한 편이나 두 편 보고 온다면 더욱 나아지겠지.
시를
무척 빠르게 쓰는 것 만큼, 장문의 글을 무척 쉽게 써내려가는 것 만큼, 라면을, 자장면을, 도너츠나 부대찌게를 무척 빠르게 먹어치우는 것 만큼
감정
이 빠르다. 빠르면서 눈부시다면 좋을텐데, 빠르면서 그냥 그렇다. 언젠가 눈동자 두 개를
몸 안쪽에 달고 태어나는 사람을 기대한 적이 있는데 자주 내 몸안의 장기며 혈액을
보고
자라났다면 어지간한 상처나 수술장면에 역겨워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고, 어지간한 여름철
노출에도 그리 자극받지 않은 채로, TB의 둘째 발가락이나 겨드랑이를 그리워하지 않고
버텨
낼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여름
철에는 명함을 차갑게 얼려 다니다가 나눠주었으면 좋겠고, 여자들은 입술 마크를
찍어서 건네주어도 좋을 것 같다. 수없이 많은 명함이 여름철에도 불티나게 돌아다니고
겨울
철에도 그다지 따듯하지 않게 옷을입고 다닌다. 명함에도 옷을 입히거나 화장을 시키거나
가제트 팔- 처럼 늘어나게 하거나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도록 하거나 소리를 내거나
전기
충격기 기능을 하거나 정말 급한 순간에 명함을 얇게 벌리면 그 안에 콘돔이나 피임약이 들어 있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