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낳았다.
왜?
알 수 없다.
그들은 아마 병에 걸려 있었을 거다.
그것은 마이크로 현미경으로도 감지되지 않는
초 마이크로 바이러스 였을 것이다.
그 바이러스 질병의 이름은 '종족본능' 혹은 '관습'이었을 것이다.
'종족본능'으로 인한 탄생이든
'관습'으로 인한 탄생이든
'학습효과'에 의한 탄생이든
내 탄생의 원인은 비참한 것이었다.
태어난 뒤로 행복한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편안함을 못느껴본 것도 어니다.
다만 행복한 시간보다는 통증의 시간, 혹은
답답함의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편안했던 날 보다도 불편했던 날이 더 많다.
한 집안의 귀염둥이로서 애완용 가축 같은 역할을 해왔다.
욕심 많은 그들은 나를 어르거나 타이르거나 겁주면서 옭아매었다.
그들을 위해 나는 공부해야 했다.
그들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등수를 유지하고 사고충동을 참고 피했다.
그들은 제법 수준 높게, 지금의 공부가 향후 나의 행복을 보장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먹혀들지 않았으나 설득 당한 척 했다.
그렇지 않았다간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 자식의 행복' 이라는 미래상을 만들고
현상태 유지나, 보다 나은 상황의 돌파구로서,
'내 자식의 행복'을 내세웠다.
그들은 나를 위해 울었으나, '내 자식의 불행' 때문에 울었을 뿐이다.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은 없다.
그들을 위해 태어난 나는, 태어나자 마자 '본능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병의 증세에 따라 먹고, 마시고, 성기를 어루만졌다.
그들을 위해 학습했다.
그들은 만족의 웃음을 짓는다. 이제 비로서 내가 그들 눈에 들만큼 성장한 것이며,
앞으로 기대치 만큼 벌이를 할 것이며, 앞으로 그들을 부양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웃음이다.
정수리에 차갑게 루비 모양으로 정제된 나의 영혼은 내 삶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들을 위해 태어났으며
생명유지의 질병에 걸렸으며
그들을 위해 학교를 다니고 공부했으며
(심지어 오로지 나를 위해 공부하던 때에도 그들은 그들의 뜻대로 내가 따르는 줄로만 이해했으며 그렇지 않다고 얘기해도 믿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며
그들의 마지막까지 부양해야 한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더이상 내게
관여할 수 없을 때가 되면 내 나이는 쉬흔 쯤
되어 있을까.
병은 깊을 데로 깊어져 나도 모르게 덜컥
아이를 낳고 거침 없이 눈믈을 흘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비겁하다, 혼자 살 용기가 없거나, 단 둘이 살 용기가 없는 거거나, 혼자 죽기가 무서운 거겠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병이라니
'인간'이 되기 전에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종족을 유지하고 사랑해야 하는 병이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인간'이 되기 전에는.
나는 이것 - 스스로 소멸하지 못하고 본능에 의해 끌려다니고 관습에 의해 보존되는 - 을
'그들 바이러스'라고 부른다.
나는 병에서 치료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