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idanCIA
거의 울며 겨자먹기로 쓴 습작의 제목은 'soulmate'란 소설이었다.
억지로 썼다면 억지로 쓴 셈인데 이유는 꽃순이라는 자가 내게 건
저주때문이다.
'팔아먹을 게 그것밖에 없는데 어떡해!'
라는 절규 비슷한 탄식으로 그가 내게 저주를 걸어버린 것이다.
파는 것. 곧 제품은 '불우한 이미지'였고 가격은 평가절하 되어
있는 상태였고 유통채널은 우리들, 가난한 인간들이며 커뮤니케
이션은 '밥사줘' 혹은 '글 몇 줄' 이었지만 우리는 역발상적인 태
도로 희망을 가지고자 했다. (이 점이 제일 역겹다.)
결국, 심약한 나는 그의 목소리를 잊고 싶어서 왠지 모를 채무감
을 가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뭐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소설의 모티브는 미셀 우엘벡의 '소립자'의 결말과 닮아있다.
인간이 결국 종말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다. 자살.
누군가 이 소설은 '왜?'가 약한 것 같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유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썼으니까.
'넌 왜 그 따위로 사는거야!'
라고 누군가 쉽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데!'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세상일에 도무지 이것만이 어렵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모두 자살하여서는 세상이 시체 썪는 냄새로
진동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꽤나 달콤하였다. 라는 문장을 쓰고
싶다. 그래, 세상은 마케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팔고 팔리고.
욕구를 충족하고 합리화하며, 종국에는 우리 모두 행복하리...라는
어이없는 믿음.
코카콜라에나 나올 법한 북극곰을 닮은 국어선생님은 조선족을
핍박하는 공장장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을 보며 한숨지었더랬다.
'인간이란 새끼들은...'
그의 말을 조나단 스위프트 식으로 고치자면 다음과 같다.
'같이 대면할 수 없는 야후들이란...'
아침에 일어나보니 하이얀 모래 위에 정처없이 떠돌고 있는 나와
나무 그늘 아래 나를 (아니 다른 누군가의 인간을) 기다리는
황연주 닮은 소녀를 만나면 좋을텐데. 왠지 모를 삶에 대한 충만
함으로 가득 찰 것이다.
길에서 호떡을 파는 할머니의 행상을 걷어가는 공무원(?)의 성실
함과 4살짜리를 성폭행하고 태워버린 사나이의 기사를 보면서
흑인 킬러 티에리 앙리가 사준 커피를 잘도 마셨다.
내가 역겹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씨. 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