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 밀레 지음, <카트린 M의 성생활>, 열린책들, 2001

 

 

 

 

 

도덕적인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질투의 표출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을 것이다. 자유 분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철학 때문에 치정의 폭발과 마주치면 도무지 어찌해야 할 지를 모른다. 너그러움과 편협함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어느 날 밤, 나는 어떤 파티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 친구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했다. 파리 제7구의 라스카즈 거리에서 제6구의 노트르담 데 샹 성당 근처까지 가는 동안 줄곧 매를 맞았고, 길가 도랑에서 그의 발에 짓밟혔다 계속 매질을 하면서 나를 끌고 갔다. 그날 밤중에 나는 그에게 매를 맞으며 걸었던 길을 되짚어갔다. 매를 맞는 와중에 떨어져 나간 보석 하나를 되찾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친구들은 나를 수직 담벼락에 바싹 붙여서 세워 놓았다. 그때의 내 모습을 본 에릭은 내가 <핀에 꽂힌 나비처럼 음경에 박혀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누가 나를 일컬어 <숨 쉬듯이 섹스를 하는 여자>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에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나는 닫힌 방에 있을 때보다 노천에 있을 때 나의 알몸을 더욱 완전하게 느낀다. 주위의 기온이 높건 낮건 간에, 내 살갗 중에서 평소에 공기가 닿지 않던 부분, 이를테면 허리의 잘록한 부분 같은 곳에 공기가 닿는 것을 느끼면, 내 몸은 더 이상 공기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공기가 관통하면서 내 몸은 활짝 열리고 더욱 민감해진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간 이동이나 여행의 개념과 섹스의 개념 사이에는 내재적인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성적인 쾌감을 느낀다는 뜻의 프랑스 어 표현인 <공중으로 보내지다 senvoyer en lair>라는 말이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파트너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을 때 내 엉덩이를 그 사람 쪽으로 이따금 쑥쑥 내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런 동작을 하려면 허리가 유연해야 하고 두 발을 모으는 편이 좋다. 엉덩이를 뒤로 내미는 동작을 자꾸 되풀이하다 보면, 마치 엉덩이가 몸의 다른 부분과 독립해서 혼자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고의 중추인 머리가 몸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듯이 말이다. 그럴 때 내 엉덩이는 내 머리와 대등한 것이 된다.

 

 

 

성행위를 하는 동안의 내 모습을 보면, 얼굴에 표정이 없다. 모두가 그렇듯이 나 역시 얼굴을 찡그리는 순간들이 있겠지만, 유리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나는 그 순간에 내가 어떠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내 시선은 멍하다. 흡사 가없이 펼쳐진 공간 속에 있을 때처럼 내면을 향해 있는 시선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감을 가지고 그 공간에서 느긋하게 어떤 지표를 찾고 있는 눈길이기도 하다.

 

 

 

변소가 사람들이 혼자 틀어박히는 장소가 도니 것은 무슨 까닭일까? 위생이 그것을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 변소가 그런 장소가 된 것은 수치심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배변 행위를 은밀하게 하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될까 걱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남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것일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은밀하게 감춰진 이유가 있다. 배변의 쾌감을 마음껏 누릴 자유, 자기 자신에게서 풍겨 나오는 악취를 맡을 자유, 아니면 변기에 대한 비유적인 묘사들을 남긴 살바도르 달리처럼 그 공간을 꼼꼼하게 살필 자유 등이 혹시 그 은밀한 이유가 아닐까?

 

 

 

나는 알몸이 노출되는 것을 별로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만일, 기차 안에서 내가 표를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헤매고 있을 때에 검표원이 퉁명스럽게 표를 요구했다면 나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 도로에서 과다 노출의 현행범으로 붙잡혔다면, 나는 그저 기분이 나빴을 뿐 수치심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관에게 들킨 몸은 숲에서 낯선 사람들의 성기가 삽입되는 몸과 별로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그 몸은 내가 들어 있는 몸이라기보다 내가 빠져나온 껍질처럼 여겨졌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통과하는 장소를 좋아하고, 특히 세상사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소도구들(뼈대만 남은 폐차, 폐허 등)을 선호한다.

 

 

 

<빠는 데에 도가 튼 여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나를 더 우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런 찬사를 들으면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내가 보기에, 그런 태도는 일종의 균형 감각에서 나오는 듯했다. 즉, 나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지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을 획득하는 것과 그 장점을 조롱하고 부정하는 행위를 아주 잘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오늘날 나는 상위 자세에서 움질일 때 고개를 너무 앞으로 숙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상대의 눈에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얼굴의 탄력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내 파트너가 눈을 크게 뜨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에게 살이 늘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다.

 

 

 

몸과 마음은 동일한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으며, 외부의 동일한 자극에 대한 몸과 마음의 반응에는 시차가 생길 수 있다.

 

 

 

자기 집에서든 일터에서든 이렇게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럴 경우에 우리는 옷의 무게로부터 가벼워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무게로부터도 가벼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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