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팀장님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하다가 느꼈다.
작은 한국 안에서도, 둘 다 서울에서 태어났는데도, 정말 살아온 환경이 이렇게 달랐을 수가 있구나.
팀장님의 말씀인 즉, “일을 해도 늘 돈이 없고… 학생 때가 가장 풍족했던 것 같다.”
“지금은 돈을 벌어도 돈 나갈 것이 너무 많은 데, 그때는 용돈을 받아서 그냥 쓰면 되었다.”
내 삶에서 가장 가난 했던 때는 학생 때였다.
그보다 어렸을 때는 돈 쓸 일이 별로 없었고, 돈 쓸 일들이 생기기 시작 할 때
그나마 몇 푼씩(고등학교 때까지 월 4~5만 원 정도) 받던 용돈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과 자취방 월세 생활비를 모두 내가 벌며 학교를 다니던 학생 때
내가 느끼는 심리적 가난은 가장 깊었다.
누구 말마따나 내가 그 달의 월급을 타면 다음 달 월급날 전까지
속 시원히 모두 써버리는 것은
돈을 풍족히 써보지 못한 젊은 날의 기억들이 여전히 맺혀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때로 가난한 젊은이는 먼 미래의 자신의 삶까지 내다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런 습성이 나로 하여금 보험 같은 걸 꺼리게 만드는 것도 같다.
이를 테면 보험은, 10년 뒤에도 잘 살아보겠다고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내일 죽을 지, 어쩌면 2년 뒤에 죽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보험은
가장 쓸모 없는 베스트셀러로 보일 뿐이다.
경기도 이천의 물류 공장에서 화재가 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많이 보인다.
어차피 사람들은 또 잠깐 슬퍼하다가 잊어버릴 것이다.
효선이와 미선이, 매년 자살하던 고3 수험생들, 기사를 보며 동화되어 눈물 흘렸던
대구 지하철 사건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것처럼.
나는 뉴스와 기사를 보며 떠들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슬픔이, 들떠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이내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사고 사망자들 중 고등학생이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움찔했다.
역시나, 풍족하지 않은 집의 자제들이 부모 힘 좀 덜어드리고 돈 좀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먼지 가득한 지하창고 속에서 시키는 대로 예-하며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돈 받으면 주말에 000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월급 타면 펀드를 좀 들어볼까… 라는 생각을 태어나 처음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 변했네… 라고 느꼈다.
집에 가는 중 피로와 우울에 찌든 한 아주머니가 시름에 찬 표정으로 튀김냄비의 기름을 걷어내고 있는 걸 보면서, 저 집의 아이는 용돈을 풍족히 받지 못할 테고, 과외도 받지 못할 테고, 아마도 가난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방 한 곳에
<패배자 보호구역>이라고 적어 놓았다.
세상에는 ‘패배자 보호구역’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도 언젠가 해고를 당하고, 사기를 당하고, 사고를 당하는데 마침 보험도 없는 형편이라서
패배자 보호구역으로 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예순 세 살이신 나의 아버지는, 그분이 쉰 살 무렵 즈음부터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라는 말씀을 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할 때가 계신다.
어쩌면 후회하지 않는 게 아니라, 후회 할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최근 들었다.
후회 할 수가 없는 사람들에게 패배자 보호구역이 필요한 것 같다.
어떤 이들에게는 때론, 희망이 무척 거칠고 건드리면 쓰라린 대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