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피고, 이병초, 작가, 2009(초판1쇄)
봄밤
공장에서 일 끝낸 형들, 누님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학산 뽕나무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창수 형이 느닷없이 앞에다 대고 “야 이년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라!”하고 고함을 질러댑니다 깔깔대던 누님들의 웃음소리가 딱 그칩니다 옥근이 형 민석이 형도 “내껏도 쪄도라, 내껏도 좀 쪄도라” 킬킬대고 그러거나 말거나 누님들은 다시 깔깔대기 시작합니다
“야 이 호박씨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랑게!” 금방 쫓아갈 듯이 창수 형이 다시 목가래톳을 세우며 우두두두 발걸음 빨라지는 입소리를 냅니다 또동또동한 누님 하나가 홱 돌아서서 “니미 솥으다 쪄라, 니미 솥으다 쪄라” 이러고는 까르르 저만치 달아납니다 초저녁 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반짝반짝 반짝이고만 있었습니다
문병
울 엄니 순창서 시집오시어
일만 벌였다 하면 꼬라박는 아버지 꼴 보시고
다섯 새끼 가르치시느라, 봄이면
묵은 김장독 헐어 문전문전 다리품 파셨네
중앙시장 맨바닥에서 무더기 무더기 채소 파셨네
호각을 불며 순경이 들이닥치고
늘어놓은 오이 가지 깻잎들 순경 발길질에
사정없이 걷어차이고, 왜 이러냐
사람 먹는 것을 왜 걷어차냐
당신은 새끼도 안 키우냐 악 쓰시던 울 엄니,
집만은 안 된다고 이 땅만은 안 된다고
플라스틱 쓰레빠 한 켤레로 해를 넘기도 또 넘겼어도
쓰레빠만 닳았던 울 엄니 삶의 평(坪)수,
연탄화덕에 코 박고 싶다고 띄엄띄엄 애간장 녹으신
보리쌀 두어 됫박도 무섭게 알고 세월 건너오신 울 엄니
풍 맞으시어 병상에 누워 계시네
못 믿을 큰자식 손을 붙잡고 비스듬히 웃으시네
둥구나무
집이서는 핵교로 몰아댔지만
육성회비 무서서 둥구나무 꼭대기에 올랐다
함께 땡땡이치기로 한 막둥이는
그냥 핵교로 가 버렸는지 아직 안 보인다
큰질로 시방 짝귀 성이 지나가는디
책가방이 두툼허다 쌀됫박깨나 펐능갑다
지나간다 똑겉이 나팔바지를 펄럭댐서
발꾸락 아픈 것맹이로 조촘조촘 걷는 뽄새가
삐딱구두 신었능갑다
불질러먹은 논두렁에 어른어른허는 것은
보리밭고랑 일곱 개를 뛰어넘는다는
고라니새끼다냐 어지럼증이다냐
황방상 너머 모악산 깊은 디서 땄다는
피버섯 굴뚝버섯 따먹고 날나리 난
어질어질 어질병 도지는 아지랑이다냐
근디 얼랠래, 뚝너머 색씨집을 칙간처럼 드나든다는
양복쟁이 영광이 성 걸음쪼깨 봐라
엿장시 똥꼬녁은 찐덕찐덕허고
과자장시 똥꼬녁은 바삭바삭허고
지름장시 똥꼬녁은 미끌미끌허다고
지가 말혀 놓고, 지 똥꼬녁은
숯장시 똥꼬녁겉이 꺼끌꺼끌헌갑다
자꼬 뒤돌아봄서 어그적어적 걷는다
미나리깡은 얼음이 거진 녹아서
모강댕이가 파르르 살었다
낫으로 잘그당 치고 싶을 만치 이쁘다
이사
부엌짐 라면박스에 싼다
쓰다 만 화장지도 덜덜거리는 선풍기도 싼다
혼잣몸 뒤치락거리다 옆구리에 혹이나 생긴
보따리들, 귓바퀴에 모여드는 새소리들
담배집 너머로 반짝이는 별들
지게바작에 곡괭이짐처럼 무겁다
티눈 박힌 시간들 손톱깍이로 파내며
파낸 자리 성냥불로 지지던 목마름
굴속 같은 이 방에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지지던 목마름, 앞방죽에 뜬 불빛들
영수증들, 약봉지들로 도배된 내 방은
생솔가지 타는 냇내가 없다
농 들어낸 자리에는
검정나방들이 함부로 널려 있다
몸통과 날개를 저렇게 따로 벗어 놓고
어디로들 떠나갔는가
검정나방의 허물을 쓸어 모으며
이불속처럼 쑤셔박힌
내 한뎃잠을 그대로 두고 떠난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조지 레이코프 (0) | 2009.02.18 |
---|---|
씨네21 - 690호 (0) | 2009.02.18 |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주노 디아스 (0) | 2009.02.15 |
지식e - 3권 (0) | 2009.02.15 |
내셔널 지오그래픽 코리아 - 2009년 2월 (0) | 2009.02.12 |